잭 노인은 마분지 조각으로 뜬 숯을 긁어모아 하얗게 꺼져가는 숯불 더미 위에 고루 덮었다. 숯불 더미가 얇게 덮이자 얼굴이 어둠 속에 잠겼으나, 다시 손수 불에 부채질을 시작하니, 쭈그리고 앉은 그의 그림자가 건너편 벽에 비치고, 얼굴이 차츰 불빛에 다시 나타났다. 뼈가 앙상하고, 털투성이 노인의 얼굴이었다. 물기 있는 푸른 두 눈은 불을 보며 껌벅거리고, 물기 있는 입은 이따금 저절로 열리고, 다물었을 때도 한두 번 오물거렸다. 뜬 숯에 불이 붙자 노인은 그 마분지 조각을 벽에다 세워놓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젠 좀 낫겠군요, 오코너 씨.”
오코너란 사람은 머리칼이 회색인 젊은이로, 얼굴에 부스럼과 여드름이 많아서 보기 흉했다. 아직까지 갸름하게 종이에다 담배를 말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일손을 멈추고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잠시 한 다음에 종이에 침을 발랐다.
“티어니 씨는 언제 돌아오겠다고 했죠?” 하고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만들어 목쉰 소리로 물었다.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오코너 씨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 속을 뒤져 얇은 마분지 카드 무더기를 꺼냈다.
“성냥을 찾아드리지요” 하고 노인은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거면 됩니다” 하며 오코너 씨는 카드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인쇄한 글을 읽었다.
시의원 선거
왕립거래소 선거구
후보자 리처드 T. 티어니(빈민구제법 관리위원)
금번 왕립거래소 선거구 선거에 귀하의 한 표와 협조를 복망하나이다.
오코너 씨는 티어니의 대리인이 선거구 일부의 운동을 맡도록 채용한 사람이었으나, 날씨가 나빠 신발에 물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빙자하여 위클로 가에 있는 선거 사무소에서 늙은 사환 잭과 함께 난롯가에 앉아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두 사람은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때부터 이렇게 앉아 있었다. 음산하고 추운 10월 6일[아일랜드의 애국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1849∼1891)의 사망일인 10월 6일이 기념일로 되어 있음]이었다.
오코너 씨는 카드를 찢어 불을 붙여가지고 담배에 대었다. 그렇게 하노라니 그의 저고리 깃에 꽂은 검은 윤택이 나는 담쟁이잎이 불빛에 반짝였다. 노인은 이 젊은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마분지 조각을 집어들고서 천천히 불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상대방 청년은 담배를 피웠다.
“그렇지요,” 하고 노인이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지 참 힘듭니다. 내 자식이 그렇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소! 가톨릭 초등학교에 보내서 그 자식을 위하여 할 만큼은 다 했는데 결과는 술이나 마시고 저렇게 돌아다니지 않소? 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려고 애를 썼는데.”
그는 고달픈 듯이 마분지를 제자리에 놓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늙지만 않았다면 그놈을 위하여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는데, 내가 아직도 그놈에게 당해 낼 기운이 있는 동안에 작대기를 집어들고 그놈 등을 단단히 패주고 싶단 말이오 ―― 그 전에 늘 하던 것처럼 말이오. 그애 어미가 이러고 저러고 해서 그놈 버릇을 굳히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버리게 되는 거죠” 하고 오코너 씨가 맞장구를 쳤다.
“암, 그렇고말고요.” 노인은 대꾸했다. “그렇다고 어디 놈들이 고마워나 합니까, 도리어 건방지게만 굴지. 아, 글쎄 그놈 눈에 내가 한 잔 한 것이 눈에 띄는 날엔 나한테 대들기가 예사란 말입니다. 자식들이 아비한테 그런 말대답을 하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겠소?”
“몇 살인데요?” 오코너 씨가 물었다.
“열아홉이랍니다.”
“왜 무슨 일을 좀 시키지 않는 거죠?”
“아, 글쎄 그 술꾼놈의 애가 학교를 나오고부터 왜 어디 일을 안 시켰던가요? ‘난 널 먹여살리진 않는다. 손수 자기 일자리쯤 구해라.’ 이렇게 늘 타이르고 있지만 글쎄 일자릴 구하면 뭘 해요, 더 나빠지는걸. 전부 술만 사먹고 만다니까요.”
오코너 씨는 동정의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고, 노인은 말을 끊고서 물끄러미 불만 쳐다보았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누가 소리쳤다.
“아니! 이건 무슨 비밀 회담인가?”
“누구시오?” 하고 노인이 물었다.
“어두운 데서 뭣들 하시오?” 하는 소리만 들렸다.
“자넨가, 하인즈?” 하고 오코너 씨가 물었다.
“그래, 어두운 데서 뭣들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하인즈 씨가 묻고는 불빛 속으로 다가왔다.
엷은 밤색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큰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이제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빗물 방울이 모자 테에 달려 있고, 짧은 외투 깃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매트, 재미가 어때?” 하고 그는 오코너 씨에게 물었다.
오코너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인은 난로 옆을 떠나, 방 안을 이리저리 살핀 다음, 초 두 자루를 들고 난롯가로 다시 와서 차례로 불을 붙여서 테이블 위에 세웠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이 시야에 들어오자, 난롯불이 그나마 희미해져 그 모든 다채로운 빛을 잃었다. 방 안의 사면 벽에는 선거 연설문 한 장이 붙어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인즈 씨는 벽난로 선반에 기대 서서 물었다.
“그래, 급료는 받았나?”
“아직 못 받았어,” 하고 오코너 씨는 대답했다. “정말 곤궁에 빠진 우리를 오늘밤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인즈 씨는 웃었다.
“줄 테지. 걱정 말게.”
“일을 잘 해나가려면 정신을 차리고서 돈을 주는 게 낫지.”
“노인 생각은 어떠시오?” 하고 하인즈 씨는 비꼬는 조로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난로 옆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하여간 돈이 없는 분도 아닌데. 저편 놈과는 다르지.”
“저편 놈이란 누굽니까?”
“콜건이지 뭐야.” 노인은 경멸조로 말했다.
“콜건이 노동자라서 그러는 겁니까? 콜건이 선량하고 정직한 벽돌공이라면 이잔 뭡니까? 술장사가 아닙니까 ―― 응? 노동자라고 해서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시정(市政)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까? ―― 어때요, 그리고 유권자 앞에서 늘 굽신거리는 그따위 알랑꾼 유지보다는 한층 더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어때, 이 사람아, 그렇지 않아, 매트?” 하고 하인즈 씨는 오코너 씨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말이 옳은 것 같애” 하고 오코너 씨는 대답했다.
“저편 사람은 절대 정직한 평범한 사람이며, 노동자의 대변자가 되려고 입후보했단 말예요. 근데 당신들이 돕고 있는 이 작잔 일자리가 탐나서 입후보한 거란 말예요.”
“물론 노동자의 대변자를 내보내야 마땅하죠” 하고 노인이 말했다.
“노동자란 모든 배척을 다 받으면서도 보수란 쥐꼬리만치도 안 되지 않느냔 말이야? 그러면서도 모든 걸 생산해 내는 건 노동이 아니고 뭐야? 노동잔 자기 아들이나 조카나 사촌을 위해 살찐 일자릴 찾고 있는 것도 아냐. 노동잔 독일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더블린의 명예를 더럽히려고는 하지 않을 것일세.”
“그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노인이 물었다.
“내년에 에드워드 왕[영국왕 에드워드 2세. 그가 더블린에 온 것은 1903년, 당시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의 숙부]이 오면 환영 연설을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걸 모르시오? 뭣 땜에 외국 왕에게 굽신거린단 말입니까?”
“우리 입후보자는 그런 연설을 하라고 찬성 투표를 하지는 않을 걸세. 국민당 공천으로 출마하니까.”
“안 할 거라구?” 하인즈 씨였다. “어디 두고 보세, 할 건지 안 할 건지. 나 그 사람 잘 안다구. 그 사람 사기꾼 디키 티어니가 아냐?”
“정말이야! 아마 자네 말이 옳을지도 몰라, 조.” 오코너 씨가 대꾸했다. “그건 어떻게 됐건 좌우간 돈이나 가지고 나타났으면 좋겠다.”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노인은 뜬 숯을 좀더 바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인즈 씨는 모자를 벗어서 턴 다음 외투 깃을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저고리 깃에 단 담쟁이잎이 보였다.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하고 그는 그 잎[1891년 10월 6일 사망한 아일랜드의 애국자 파넬의 상징]을 가리켰다. “환영연설 같은 건 입 밖에도 내지 못할 걸세, 우린.”
“그건 그래” 하고 오코너 씨도 맞장구를 쳤다.
“참, 그땐 살 만했지요! 그땐 그 잎사귀도 얼마간 살아 있었는데” 하고 노인도 한마디 했다.
방 안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고 귀가 몹시 언 듯한 키가 작달막한 사람 하나가 부산하게 문을 밀어제치고 들어왔다. 난로 앞으로 빨리 걸어오며 불이 날 듯이 두 손을 비비대며 말했다.
“돈이 없다네, 이 사람들.”
“여기 앉으시오, 헨치 씨” 하며 노인이 자리를 내주었다.
“아, 일어서지 말아요, 잭, 일어서지 말아요” 하고 그는 하인즈 씨에게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인이 내준 의자에 앉았다.
“안저 가에 다녀오셨소?” 하고 그가 오코너 씨에게 물었다.
“예” 하고 오코너 씨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메모를 찾기 시작했다.
“그라임 씨도 찾아뵙고?”
“예.”
“옳지. 그 사람 어느 편입니까?”
“확답은 못 얻었습니다. ‘어느 쪽 투표를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 못하겠소’ 이러던데요, 그분 말씀이. 하지만 그분은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왜요?”
“추천인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버크 신부님을 대드렸으니 잘될 것 같습니다.” 헨치 씨는 한바탕 코를 킁킁거리는 둥 불을 쬐며 무섭게 빨리 손을 비비대는 둥 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 잭, 제발 석탄 좀 가져오시구려. 좀 남아 있을 테니.”
노인은 방을 나갔다.
“통하지 않아” 하고 헨치 씨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꼬마 자식더러 돈을 좀 달라고 했더니, 아 글쎄, 하는 소리가 ‘자, 헨치 선생, 일이 잘돼 나가는 것이 보이면 어찌 노형을 잊겠소. 걱정 마시오’ 이러는 게 아니겠소. 야비한 깍쟁이 자식 같으니라구! 그렇지 않고 뭐요?”
“내가 뭐라고 하던가, 매트?” 하인즈 씨가 끼어들었다. “사기꾼 디키 티어니라니까.”
“아, 과연 소문과 다름없는 사기꾼이야.” 헨치 씨도 맞장구를 친다. “눈이 돼지새끼 눈 같더니 역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 망할 자식 같으니라구! 남자답게 돈을 척 내놓지 못하고 한다는 소리가, ‘자, 헨치 씨, 패닝 씨에게 부탁을 좀 해봐야 되겠소…… 돈을 벌써 많이 써버려서’ 이러더란 말이야. 깍쟁이 같은 망할 자식! 그 자식은 메리 로에서 제 아비가 누더기 장수를 하던 시절이 생각나지도 않나 봐.”
“사실은 이만저만한 사실이 아니지.”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그 얘길 처음 듣소? 그리고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에 남들이 나와 다니기 전에 그 가게로 가서 양복 조끼며 바지를 사곤 했지 뭐요! 근데 사기꾼 디키 영감은 가게 한 구석에다 괴상한 조그만 까만 병 하나를 늘 감춰두고 있었다오. 이젠 아시겠소? 거기서 배운 재주요. 자식이 세상 구경을 비로소 하게 된 것이 바로 거기서라는 말이오.”
노인은 석탄 몇 덩어리를 가지고 돌아와서 그것을 불 위 여기저기다 놓았다.
“거 잘됐군요” 하고 오코너 씨가 대꾸했다. “돈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더러 자기를 위해 일을 해달랄 셈이죠?”
“난들 어떻게 하겠소?” 하고 헨치 씨가 말했다. “집에 가보면 차입하러 집달관이 와 있을 텐데.”
이 말에 하인즈 씨는 껄껄 웃으며, 등으로 벽난로 선반을 밀어 몸을 일으켜세우고서 떠날 준비를 했다.
“왕인지 뭔지가 왕림하시는 날엔 만사가 다 잘될 걸 뭘 그러시오? 자, 여러분, 여기서 소생은 물러나렵니다. 나중에 또 만납시다. 안녕히” 하고 그는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헨치 씨도 노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문이 닫히려고 할 찰나 불을 침울하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오코너 씨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잘 가게, 조.”
헨치 씨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물었다.
“저잔 뭣 하러 여길 왔지? 어쩌자는 거요?”
“참, 불쌍한 친굽니다.” 오코너 씨는 담배 꽁초를 불 속으로 던지며 대꾸했다. “군색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헨치 씨가 어찌나 심하게 콧물을 훌쩍거리고 침을 뱉었던지, 난롯불이 꺼질 듯이 싯 소리를 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솔직히 말한다면,” 하고 그는 말했다. “왠지 저잔 저쪽 선거 사무소에서 온 것만 같애. 말하자면 그잔 콜건의 스파이야. 잠깐 가서 그자들이 어떻게들 하고 있나 보고 오시오. 그쪽선 자넬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알겠소?”
“아니, 조는 점잖은 사람입니다” 하고 오코너 씨가 대꾸했다.
“그자 아버진, 그야 점잖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지” 하고 헨치 씨도 시인했다. “가엾은 래리 하인즈 영감이었소. 생전에 좋은 일을 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근데 어째 저 친군 사람이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애, 암만해두. 제기랄, 사람이 군색하다면 그건 이해가 가지만 남의 등이나 쳐먹는 놈이라면 그건 도저히 동정이 안 가. 왜 놈이 저렇게도 사내다운 데가 없는 거지?”
“그놈이 올 땐 어째 반겨 맞을 생각이 안 듭니다.” 노인도 한마디 했다. “자기 편 일이나 할 것이지 스파이 짓하러 여길 오다니.”
“글쎄요” 하고 동감이 안 간다는 말투로 말하고 나서 오코너 씨는 담배 마는 종이와 담배를 꺼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조 하인즈는 곧은 사람 같던데요. 그 친구 글도 곧잘 쓰는 머리도 좋은 친굽니다. 그 친구가 쓴 걸 알고 계십니까……?”
“말하자면 저런 힐사이드 단원이니 패니아 단원[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185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이니 하는 녀석들은 좀 너무 약아요” 하고 헨치 씨가 끼어들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녀석들에 대해 내 개인적이며 솔직한 의견이 뭔지 아시겠소? 그놈들 중 반은 성[1922년의 독립 이전에 영국 총독 관저로 사용된 더블린에 있는 옛 성]의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게 내 신념이오.”
“모를 소린데요” 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안다구 난.” 헨치 씨도 지질 않았다. “놈들은 성의 삯일꾼들이오…… 하인즈도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아니, 제기랄, 그놈이 그렇게까지 비굴하다곤 생각지 않지만……. 그러나 사팔뜨기 눈을 한 어떤 귀족 부스러기 놈이 하나 있단 말이야 ――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애국잔 누군지 짐작이 가지?”
오코너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놈은 서 소령[1803년 애국자 에메트가 더블린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체포하여 사형당하도록 방조한 군인]의 직계요! 아, 애국자 중의 애국자지! 그놈은 자기 조국을 능히 동전 네 푼에 팔아먹을 놈이란 말이오 ―― 그렇고말고 ―― 전능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팔아먹을 나라가 있는 걸 고마워할 놈이란 말이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헨치 씨였다.
가난한 목사 같기도 하고, 가난한 배우 같기도 한 사람이 문간에 나타났다. 작달막한 몸을 감싼 그의 까만 옷에는 단추가 빳빳하게 채워져 있었다. 신부의 칼라를 대고 있는지 평신도의 그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가리지 않은 단추가 촛불에 번쩍이는 초라한 프록코트의 칼라가 세워져 있어 목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딱딱한 까만 펠트 천의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빗방울로 번쩍이는 얼굴은 두 개의 장미색 반점이 광대뼈가 있는 자리를 알려주는 곳 이외는 비에 젖은 노란 치즈같이 보였다. 아주 길쭉한 입을 갑자기 벌리고는 실망의 뜻을 나타냈고, 동시에 유난히 맑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기쁨과 놀람을 나타냈다.
“아, 키온 신부님 아니십니까!” 하고서 헨치 씨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부님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 아니, 아니, 아닙니다.” 키온 신부는 급히 이 말을 하고서 마치 어린애라도 상대하는 것처럼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들어와 앉으십시오.”
“아니, 아니, 아닙니다!” 하고 키온 신부는 정중하고, 너그럽고, 비로드 같은 목소리로 연방 사양했다. “괜히 폐를 끼치는가 보군요! 그저 잠깐 패닝 씨가 계신가 하고서…….”
“블랙 이글[술집 이름]에 가 계신데요.” 헨치 씨가 대꾸했다. “하지만 들어오셔서 잠깐 앉으십시오.”
“아니, 아니, 고맙습니다. 그저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고맙습니다, 정말.”
그러면서 신부는 문간에서 돌아섰다. 헨치 씨는 초 한 자루를 집어들고서 신부가 내려가는 길을 비춰주려고 문까지 따라갔다.
“아, 괜찮습니다, 정말!”
“천만에요, 계단이 너무 컴컴해서.”
“아니, 아닙니다. 잘 보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이젠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헨치 씨는 초를 들고 방 안으로 돌아와 그것을 다시 테이블 위에 세워놓고 난롯가에 다시 앉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저, 존” 하고 오코너 씨는 다시 마분지 카드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요?”
“저 사람 정체가 뭡니까?”
“수수께끼요.”
“패닝과 아주 친한 사이 같더군요. 가끔 캐바나 술집에서 어울리던데요. 도대체 저 사람 신부이기나 합니까?”
“음 그렇죠, 그렇게 믿소, 난……. 소위 검은 양이라는 그걸 거요. 그런 사람이 많지 않기가 다행이죠! 하지만 좀 있기는 있지…… 일종의 불운한 사람인가 봐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 먹고 사는 거죠?” 하고 오코너 씨가 물었다.
“그것도 수수께끼.”
“어느 예배당이나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 밖에 어디 소속된 데라도 있는 겁니까?”
“없어. 제멋에 겨워 저러고 다니는가 봅니다…… 뭣한 얘기지만” 하고는 덧붙여, “스타우트 맥주쯤은 한 다스는 거뜬히 치우는가 봅니다.”
“술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한 잔 안 될까요?” 오코너 씨가 물었다.
“나도 간절한뎁쇼.” 노인도 맞장구를 친다.
“그 깍쟁이 새끼한테 세 번이나 부탁을 했소이다.” 헨치 씨는 대답했다. “스타우트 한 다스만 보내달라고. 좀 전에도 다시 한번 부탁했는데, 와이셔츠 바람으로 카운터에 기대앉아서 부시장 카울리하고 수군덕거리고만 있습디다.”
“왜 좀 알아듣도록 말 못했죠?” 오코너 씨가 따지는 투다.
“글쎄, 부시장 카울리에게 얘길 하고 있는 동안 가까이 가기가 싫었습니다.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부탁한 그 사소한 것 말인데……’ 했지만 ‘문제없다니까, 헨치 씨’ 이러는 게 아니겠어. 그 꼴로 봐서 그 새끼가 모든 걸 다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니까.”
“그자들이 거기서 무슨 공작을 하고 있더군요.” 오코너 씨가 무슨 생각되는 바가 있다는 듯이 말했다. “어저께 그자들 셋이 서포크 가 모퉁이에서 열심히 그 공작을 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자들이 무슨 공작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하군.” 헨치 씨가 대꾸했다. “요새는 시장으로 뽑아준단 말이야, 그자들이. 아니, 나도 시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제법 드는데. 노형 생각은 어떻소? 나도 제법 그 일을 해낼 것 같소?”
오코너 씨는 껄껄 웃었다.
“돈을 돌리는 일뿐이라면 그야…….”
“시장 댁에서 차를 몰고 나온단 말이야.”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버러지 같은 중생들 속으로. 여기 계신 잭 노인은 분을 칠한 가발을 쓴 내 뒤에 서 있고 ―― 어때?”
“그리고 날 개인 비서로 삼고.”
“그렇지. 그리고 키온 신부는 내 전용 신부로 삼고. 그러면 그때 우린 다 모여 집안 잔치나 한번 차립시다.”
“참, 저, 헨치 선생” 하고 노인이 끼어들었다. “선생은 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호화스럽게 사실 겁니다. 어느 날 시장댁 문지기 영감 키건을 만나 ‘그래 새 주인이 마음에 드시오, 패트? 요샌 연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더군요’ 하고 말했더니 영감 하는 소리가 ‘연회요! 시장이란 사람이 기름 걸레 냄새를 반찬으로 알고 사는 걸요’ 이러더란 말예요. 그리고 그 영감이 나에게 뭐라고 한 줄 아쇼? 꿈에도 믿지 못할 소리였소이다.”
“뭐라고 했는데요?” 헨치 씨와 오코너 씨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이럽디다 ―― ‘더블린의 시장 나으리가 사람을 시켜 저녁거리로 고기 한 근만 사오라고 한다면 노형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높으신 분이 사시는 꼴이 그래 이래서야 되겠소?’ 이 말을 듣고 내가 ‘흥! 흥’ 했더니, ‘고기 한 근을 시장댁에서 사들였다니까요’ 이러더라구요, 그 영감이. ‘흥! 이번엔 어떤 사람이 시장이 될지 원?’ 하고 내가 말했죠.”
이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소년 하나가 머리를 안으로 디밀었다.
“뭐냐?” 하고 노인이 물었다.
“블랙 이글에서 왔는데요” 하고 소년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와 병 소리가 덜거덕거리는 바구니를 마루 위에 놓았다.
노인은 소년을 도와 병을 바구니에서 비워 테이블로 옮긴 다음 전체를 세어보았다. 다 옮기고 난 다음 소년은 바구니를 팔에 걸치고는 물었다.
“빈 병이 있습니까?”
“무슨 병 말이냐?” 노인이 물었다.
“마셔야 빌 것이 아니냐?” 헨치 씨도 한마디 했다.
“병이 있느냐고 물어보라고 주인이 그랬어요.”
“내일 오너라” 하고 노인이 말했다.
“야, 이봐! 너 오패럴 댁에 달려가서 병따개를 좀 빌려다 줄래?―― 헨치 씨가 빌려달랜다고그래. 곧 돌려보내드린다고. 그리고 바구닌 거기 놔라.”
소년이 나가자, 헨치 씨는 아주 기분이 좋아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아,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군그래. 약속만큼은 지키는 사람이군, 어쨌든.”
“잔이 없습니다” 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 그런 데 마음 쓸 것 없어요.” 헨치 씨가 대꾸했다. “자고로 병째로 마신 어른이 얼마나 많았다구요.”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낫군.”
오코너 씨가 한마디 했다.
“나쁜 사람은 아냐.”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패닝이 빚을 많이 져서 그럴 따름이야. 손은 작지만 마음만은 좋은 사람이야, 알지?”
소년이 병따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노인은 병 셋을 따고, 그것을 소년에게 주려는데 헨치 씨가 소년에게 말했다.
“너도 한 잔 할래, 얘야?”
“주시렵니까?”
하고 소년이 말했다. 노인은 마지못해하면서 병 하나를 더 따서 소년에게 주며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
노인이 그 이상 더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소년은 집어들고서, “헨치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는 술을 쭉 마시고 나서 병을 테이블 위에 다시 놓고 소맷자락으로 입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병따개를 집어들고서 비틀비틀 문을 나가며 뭐라고 인사말을 남겼다.
“저게 망하게 되는 시초랍니다” 하고 노인이 말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그 말이지요.” 헨치 씨가 맞장구를 쳤다.
노인이 병마개를 딴 병 셋을 나누자 세 사람은 동시에 나발을 불었다. 다 마신 다음 제각기 마신 병을 손을 뻗어 난로 위에 놓고 흐뭇한 숨을 길게 내뿜었다.
“아, 오늘은 일 많이 했다.” 잠시 후에 헨치 씨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존?”
“그렇지. 도슨 가에서 한두 군데 표를 확보했어. 크로프튼하고 나하고 둘이서 말이야. 자네도 알잖아,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크로프튼은(물론 사람은 점잖지만) 선거 운동원으로서는 아무 소용도 없어. 말하는 덴 담싼 사람이거든. 그래서 내가 얘길 하는 동안 그 친군 그저 가만히 서서 사람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밖에.”
이때 웬 사람 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아주 살찐 사람으로, 푸른 사지 양복이 절구통 같은 몸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고, 표정이 황소 새끼를 닮은 커다란 얼굴에는 푸른 눈이 떼굴떼굴하고, 희끗희끗한 콧수염이 자라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훨씬 젊고 몸이 약해 보이는 편인데, 여윈 얼굴에는 깨끗이 면도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주 높은 더블 칼라를 대고 있고, 테가 넓은 중산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이, 크로프튼!” 헨치 씨가 뚱뚱보 사나이를 보고 반색을 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술은 어디서 났어? 암소가 새끼를 낳은 셈인가?” 하고 젊은이가 익살을 부렸다.
“그래,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자넨 술 냄새부터 맡나!” 하고 오코너 씨가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자네들 선거운동을 한다는 거야?” 라이언스도 지질 않는다.
“나와 크로프튼은 찬비를 맞아가며 표를 긁어모으고 있는데.”
“뭐라고, 집어쳐.” 헨치 씨도 지질 않는다.
“난 자네 두 사람이 일주일에 얻어내는 표를 단 오 분 내에 얻어내는 사람이야.”
“스타우트 두 병만 따요, 잭.” 오코너 씨가 말했다.
“어떻게요?” 노인이 대꾸했다.
“병따개가 있어야지요?”
“가만 있어, 잠깐만 기다려!” 하고 헨치 씨가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재줄 구경한 적 있소?”
그는 테이블에서 병 두 개를 집어들고, 난롯불로 가지고 가서 벽난로의 양쪽 시렁 위에다 놓고, 난롯불 옆에 앉아서 자기 병을 들고 또 한 모금 마셨다. 라이언스 씨는 테이블 모서리에 앉아 모자를 뒤로 제껴쓴 다음 두 다리를 흔들흔들하며 물었다.
“어느 것이 내 병이지?”
“이거지 뭐야, 이 사람.” 헨치 씨가 대꾸했다.
크로프튼 씨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 시렁 위의 다른쪽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하나는 ――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깔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에는 보수당원인 윌킨스의 운동원이었으나, 보수당이 입후보를 포기하고 두 가지 피해 중 덜 불리한 것을 택하여 국민당 입후보자를 지지하게 되자 그는 티어니 씨의 운동원이 된 것이다.
얼마 있자 “폭!”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언스 씨의 병에서 병마개가 날아갔다. 라이언스 씨는 테이블에서 뛰어내려 난롯가로 가서 병을 집어들고 테이블 있는 데로 돌아왔다.
“방금 그 얘길 하던 중이야, 크로프튼.” 헨치 씨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오늘 확실히 표를 몇 표 얻었다는 얘길 말이야.”
“누구 표를요?” 하고 라이언스 씨가 물었다.
“저, 파크스의 한 표, 앳킨슨의 두 표, 그리고 도슨 가의 와드도 끌어들였지 뭐야. 역시 훌륭한 영감이더군 ―― 제법 점잖은 멋쟁이 영감이던데그래, 오랜 보수당원이고! ‘그런데 노형 후보잔 국민당원이 아니던가요?’ 하고 묻길래,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뭐나 그 편에 드는 사람이지요. 굉장히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입니다. 시내에 굉장히 큰 집을 가지고 있고, 사업체도 세 군데나 됩니다. 그래서 세금을 깎아내리는 것이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일도 됩니다. 저명하고 존경을 받는 시민일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법 관리위원이기도 하고, 좋든 나쁘든 어느 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초연한 사람입니다’라고 해줬지 뭐야. 말만은 이렇게 해야 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왕에 대한 환영 연설은 어떻습니까?” 하고 라이언스 씨는 술을 마신 다음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하고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내가 와드 노인에게 말했듯이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자본이오. 왕이 여기 온다는 것은 이 나라에 돈이 흘러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오. 더블린 시민은 그것으로 혜택을 보게 될 것이오. 여기 부둣가의 모든 공장이 폐업중인 것을 보시오! 우리가 종래의 산업, 제분소니 조선소니 그리고 각종 공장이니 하는 것들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나라 안에 굴러들어올 돈이 얼마나 될지 그걸 좀 보란 말이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본이오.”
“하지만 이것 봐요, 존” 하고 오코너 씨가 끼어들었다.
“왜 우린 영국 왕을 환영해야만 하는 거죠? 파넬 자신도…….”
“파넬은요,” 하고 헨치 씨가 대꾸했다.
“이미 간 사람이오. 자, 난 이렇게 본단 말이오. 이제 온다는 이 작잔 노모[빅토리아 여왕을 가리킴] 때문에 머리가 성성하기까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 왕위에 오른 사람이오. 그는 세상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며, 우리에게 악의가 없소. 내 생각 같아서는 그 사람은 명랑하고 훌륭한 점잖은 사람이고, 악의라곤 전혀 없어요. 그는 오직 이렇게 혼잣말을 할 뿐이란 말이오 ―― ‘선왕께선 이 야만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을 보러 간 적이 없었다. 어디 내가 친히 가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와야겠다.’ 근데 이처럼 우호적 의도로 찾아오는 사람을 모욕할 셈인가요, 우린? 어때? 그렇지 않아, 크로프튼?”
크로프튼 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결국 이제……” 하고 라이언스 씨는 따지고 들었다.
“알잖아요, 에드워드 왕의 생활은 그다지…….”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대로 내버려두라구요.”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난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을 숭배해. 자네나 나와 마찬가지로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한 잔 술을 좋아하고, 아마 다소 난봉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훌륭한 스포츠맨이야. 제기랄, 우리 아일랜드인은 페어 플레이도 할 줄 모른단 말이오?”
“모두 다 대단히 지당한 말씀이에요. 하지만 파넬의 경우도 좀 생각해보셔야죠.”
“도대체 양자간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내 말은 우리에게도 우리 이상이 있다는 말이지요. 자 왜 우린 그따위 사람을 환영해야 합니까? 파넬의 업적으로 보아서 파넬이야말로 우릴 지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말예요. 당신은 어때? 그렇다면 뭣 땜에 우리가 에드워드 7세를 위하여 그따위 짓을 해야 하겠느냐 말예요.”
“오늘은 파넬의 기념일이오.” 두 사람 사이로 오코너 씨가 끼어들었다.
“그러니 서로 감정이 상하게 하지는 맙시다. 파넬이 고인이 되어 이제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를 존경하는 게 아니겠소? ―― 보수당원들까지도 말예요.” 크로프튼 씨를 돌아다보며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폭! 하고 이때서야 크로프튼 씨의 병마개가 날아갔다. 크로프튼 씨는 앉아 있던 상자에서 일어나 난로 앞으로 갔다. 술병을 들고 돌아오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당도 그를 존경해요. 그는 신사였으니까.”
“자네 말이 맞았어, 크로프튼!” 하고 헨치 씨는 버럭 화를 냈다.
“그 고양이 우리 같은 의사당의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앉아라, 개들아! 드러누워라, 똥개들아!’ 이렇게 취급했으니까. 들어와, 조! 들어와!” 하며 그는 문간에 들어선 하인즈 씨를 보고서 불렀다.
하인즈 씨는 천천히 들어왔다.
“스타우트 한 병만 더 따시오, 잭. 아니, 병따개가 없는 걸 깜박 잊어버렸군! 자, 이리 하나만 보내시오, 그러면 난로 위에다 놓을 테니.”
헨치 씨의 말에 노인이 술병 하나를 건네주자, 그는 그것을 벽난로 시렁 위에다 놓았다.
“앉아, 조. 우리 지금 대장[파넬은 국민당 당수였음] 얘길 하는 중일세.”
오코너 씨의 이 말에 헨치 씨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렇지!” 하인즈 씨는 라이언스 씨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한쪽에 앉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람 하나만은 파넬을 반대한 일이 없는 사람이오.” 헨치 씨는 말을 이었다.
“내 말이 옳지, 조! 자넨 시종일관 그를 지지해 왔지!”
“어이, 조” 하고 오코너 씨가 별안간 끼어들었다.
“자네가 쓴 그걸 내놓게 ―― 무슨 말인지 알지? 지금 가지고 있나?”
“아, 그래!” 헨치 씨도 맞장구를 쳤다.
“이리 내놔. 들어본 일이 있어, 크로프튼? 이제 들어보라구, 참 근사할 테니.”
“자, 어서.” 오코너 씨가 재촉했다.
“시작해, 조.” 하인즈 씨는 이 사람들이 어느 것을 말하는지 금방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니 잠시 생각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아, 그것 말이군……. 알았어, 그건 퍽 오래돼서.”
“그걸 해봐, 이 사람아!” 오코너 씨가 계속 재촉했다.
“쉿, 쉿.” 헨치 씨도 거들었다.
“자, 조!”
하인즈 씨는 좀더 망설였다가 모두가 말이 없는 가운데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다 놓고 일어섰다. 속으로 다시 외워보는 것 같더니 좀더 가만히 있다가 읊기 시작했다.
그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외우기 시작했다.
파넬의 죽음
1891년 10월 6일
님 가시다, 우리의 무관(無冠)의 왕 가시다.
오, 아일랜드여, 설움과 슬픔으로 울지어다.
현세의 위선자들 무리에 꺾여
님 이제 가시고 말았으니.
님 비겁한 도배들의 칼에 맞고 가시니
님 도탄에서 영광의 나라로 오르셨네.
아이랜드의 희망이며 아일랜드의 꿈은
우리 왕을 보내는 불 위에서 사라지다.
궁전과 초옥과 또한 오막살이에
아일랜드의 정기가 살아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설움에 묻혀 있으니
아일랜드의 운명을 지으실 님 가셨으니.
조국의 명성을 떨치셨고,
영광의 초록색 깃발을 휘날리시며,
세계의 만방 앞에
조국의 문무(文武)의 성좌를 빛내셨을 님.
님은 자유의 꿈을 품으셨으나
(아, 슬프도다, 꿈에 지나지 않았음이!)
그 자유를 얻으려고 싸우실 때에
배신을 당하시와 못 이룬 님의 사랑.
시왕(弑王)의 대역(大疫)을 저지른 비겁한 놈들이여
기꺼이 님의 친우가 아닌
어중이떠중이 돌중의 무리에게 님을 팔아버린
비겁한 놈들이여 부끄럽지 않느냐.
님의 자부심으로 저들을 물리치신
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애써 더럽히려 한
자들의 기억은 썩어 천만년
치욕에 묻혀 썩을지어다
용맹한 자들이 가시듯이,
님도 종생토록 고결하고 두려움 없이 가셨으니,
그 죽음, 님을 이끌어 아일랜드의 역대
영웅들 사이에 님을 끼게 하였어라.
어떠한 투쟁의 소리도 님의 잠을 괴롭히지 말라!
님 고요히 잠드시니, 이제는 그쳤어라.
영광의 정상에 오르려는 님의
그 어떤 인간적인 고통도, 그 어떤 고상한 야망도.
저들은 소원대로 님을 꺾었으되
들어라, 아일랜드여, 님의 영혼은
새 날의 먼동이 훤히 틀 때,
불사조처럼 불꽃에서 일어나리.
자유의 통치를 가져다 주는 그날
조국이 기쁨에 드리는 술잔 속에서
한 방울 설움 ―― 파넬의 기억을
잊지 말 것을 조국이여, 맹세할지어다.
하인즈는 다시 테이블 위에 앉았다. 낭독이 끝나자 잠잠하던 침묵을 깨뜨리고 박수가 터졌다. 라이언스 씨까지도 박수를 쳤다. 갈채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나자 그것을 듣던 모든 사람들은 아무말도 없이 병을 들어 술을 마셨다.
폭! 하고 하인즈 씨의 술병에서 병마개가 날아갔으나, 하인즈 씨는 홍조 띤 얼굴에 모자를 벗은 채 테이블 위에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서 그 술을 마시라는 소리도 못 들은 것만 같았다.
“잘했어, 조!” 하며 오코너 씨는 흥분을 감추려고 담배 마는 종이와 쌈지를 꺼냈다.
“노형 생각은 어떻소, 크로프튼?” 헨치 씨가 큰소리로 외쳤다.
“훌륭하지요? 어때요?”
크로프튼 씨도 정말 훌륭한 글이라고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