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기의 딸 릴리는 글자 그대로 발이 닳아빠질 지경이었다. 아래층 사무실 뒤에 있는 자그마한 식기실로 손님 한 분을 안내하여 미처 외투를 벗겨주기도 전에 현관문 초인종이 찌르릉 하고 울렸기 때문에 곧 또 널마루를 달려가 다른 손님을 맞아들여야 했다. 여자 손님들까지 맞아들이지 않아도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케이트와 줄리아는 여자 손님이 올 것을 예상하여 위층 욕실을 여자들의 휴게실로 만들어놓았다. 케이트와 줄리아는 거기서 노닥거리고 웃고 법석대다가는 우르르 층계 꼭대기로 몰려나와서 난간 위를 기웃거리기도 하며 아래층에 있는 릴리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누가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모컨의 자매가 해마다 여는 댄스 파티는 언제나 큰 행사였다. 파티에는 그녀들을 아는 모든 사람, 즉 일가 친척, 집안의 오랜 친구들, 줄리아가 지휘하는 합창단원들, 케이트의 제자 중에서 성인이 다 된 사람들 전부와 메리 제인의 제자들 중 몇 명도 왔다. 파티가 시시하게 끝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이 더듬을 수 있는 한의 여러 해를 두고 이 파티는 늘 대성황을 이루었다. 오빠 패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케이트와 줄리아 두 자매가 하나밖에 없는 조카 메리 제인을 데리고 스토니 배터[더블린의 거리 이름]에 있는 집을 떠나 어셔스 아일랜드의 어두컴컴하고 초라한 이 집에 와서 살게 된 이래로 해마다 그 댄스 파티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집 이층을 그 아래층에서 곡물 도매상을 하는 풀럼 씨에게 세낸 것이었다. 그것은 줄잡아도 족히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짧은 옷을 입은 소녀였던 메리 제인이 이제는 집안의 기둥이 되었고, 해딩턴 로의 성당에서 오르간을 쳤다. 메리 제인은 왕립 음악학교를 나오고, 해마다 에인센트 음악당 이층에서 제자들의 음악회를 열었다. 그녀의 제자들 대다수는 킹스타운과 돌키 사이 철도 연변에서 사는 상류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늙기는 했으나 두 고모도 제 몫을 다했다. 줄리아는 아주 백발이긴 했지만 아직도 ‘아담과 이브회(會)’의 제1소프라노였고, 케이트는 몸이 허약해서 나다닐 수가 없어 뒷바에 있는 헌 피아노로 초보생들에게 음악 개인지도를 하고 있었다. 문지기의 딸인 릴리가 살림을 도맡아보았다. 간소한 살림이긴 했으나 식사만은 잘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 ―― 마름모꼴로 썬 등심, 3실링짜리 차, 병에 담은 상등품 스타우트 술 따위를 썼다. 그러나 릴리는 별로 시키는 일을 어기는 일이 없어서 안주인을 셋이나 무난히 모시고 있었다. 잔소리가 더러 있었을 뿐 모시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말대답만은 금물이었다.
물론 이런 날 밤엔 그들이 수선을 떠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그런 데다가 10시가 지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가브리엘 내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레디 맬린즈가 곤드레가 되어 오지 않을까 몹시 겁이 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메리 제인의 제자들 앞에서 프레디의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프레디는 술에 취하면 여간 다루기 힘든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프레디가 늦게 오는 것쯤은 예사지만 가브리엘이 왜 이렇게 늦게 오는지 알 수 없었다. 2분마다 그들 자매가 난간 있는 데로 와서 릴리에게 가브리엘과 프레디가 왔느냐고 묻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 콘로이 선생님” 하며 릴리가 가브리엘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케이트 아주머니와 줄리아 아주머니께서 선생님이 아주 안 오시나 보다고 걱정들을 하고 계셨지 뭐예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러셨을 거야, 그러나 우리 집사람이 차리고 나서는 데 지겹게 세 시간이나 걸린다는 걸 잊어버리신 게로군.”
가브리엘은 자리 위에 서서 덧신에 묻은 눈을 탁탁 털어냈다. 그러는 동안에 릴리는 그의 부인을 계단 밑까지 안내하고 나서 위층으로 소리쳤다.
“케이트 아주머니, 콘로이 선생님 사모님께서 오셨어요.”
그 말을 듣고 케이트와 줄리아는 어두운 계단을 구르듯 내려왔다. 둘이 가브리엘의 아내에게 키스하고는 추워서 혼이 났겠다고 하면서 가브리엘도 같이 왔느냐고 물었다.
“편지처럼 틀림없이 여기 와 있습니다. 케이트 이모님! 어서 올라가세요. 곧 따라갈 테니까요” 하고 가브리엘이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세 여자가 웃으면서 위층 부인 휴게실로 올라가는 동안에 그는 내내 신발을 닦고 있었다. 그의 외투 어깨에 케이프를 두르듯이 얄팍하게 눈이 덮이고, 덧신 콧머리에도 하얗게 눈이 묻어 있었다. 외투 단추가 눈에 얼어 뻣뻣해진 프리즈 천 사이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을 때 바깥으로부터 싸늘한 향기로운 바람이 문 틈과 커튼의 주름 사이로 들어왔다.
“또 눈이 오나요, 콘로이 선생님?” 하고 릴리가 물었다. 릴리는 앞장서서 식기실로 들어가서 그의 외투를 벗겨주었다. 가브리엘은 그녀가 그의 성을 부른 세 음절에 싱긋이 웃으며 릴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릴리는 성장기에 있는, 안색이 창백하고 노릿한 머리칼을 가진 몸매가 호리호리한 아가씨였다. 식기실 가스등 때문에 그녀는 한층 더 창백하게 보였다. 가브리엘은 릴리가 어릴 때 층층대 맨 밑 계단에 앉아 헝겊 인형을 가지고 놀던 때부터 릴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 릴리, 밤새 올 것 같은데”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위층에서 쿵쿵거리고 찍찍 끄는 발자국 소리 때문에 흔들거리는 식기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피아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선반머리에서 자기 외투를 정성껏 개고 있는 처녀를 다시 흘낏 바라보았다.
“이봐, 릴리야, 너 아직도 학교에 다니니?” 하고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뇨, 학교를 졸업한 지가 1년도 넘어요.”
“아, 그렇다면,”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명랑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머지않아 신랑을 보러 네 결혼식에 가보게 되겠구나, 응?”
처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다보며 독살맞게 쏘아붙였다.
“요새 남자들은 모두 입만 까져서 사람을 곯리려고만 드는 걸요.”
가브리엘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처녀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덧신을 벗어버리고, 목도리로 에나멜 구두를 부지런히 닦았다.
가브리엘은 건장하고 키가 큰 사나이였다. 두 뺨의 붉은 빛은 이마까지 퍼져올라가 거기서 희미한 몇 개의 반점이 되어서 퍼졌다. 그리고 수염이 없는 얼굴에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의 번뜩거리는 렌즈와 도금한 테가 침착성을 잃은 듯 번쩍거렸다. 반질반질한 검은 머리는 한가운데서 갈라 귀 밑까지 길게 물결치듯 빗어 뒤로 보내고, 모자를 썼던 자리 아래서 가볍게 컬을 이루고 있었다.
구두를 반짝거리도록 닦고 나자 그는 일어나 가뜩이나 뚱뚱한 몸에 조끼를 더 한층 바싹 끌어내려 빳빳하게 입은 다음 주머니에서 재빨리 돈 한 닢을 꺼내서 릴리의 손 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자, 릴리, 크리스마스 때니까, 아주 적지만…… 그저…… 좀…….”
그는 재빨리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안 돼요!” 처녀는 큰 소리를 지르며 그의 뒤를 쫓아왔다. “정말이에요, 전 못 받겠어요!”
“크리스마스 때잖아! 크리스마스!” 가브리엘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면서 계단 있는 데로 가 한 손을 휘저으며 제발 받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릴리는 그가 벌써 계단까지 간 것을 보고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럼, 고맙습니다.”
그는 응접실 밖에 서서, 왈츠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마루 위를 스쳐가는 치맛자락이며, 찍찍 끄는 구둣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릴리의 의외로 독살스러운 말대답으로 인하여 아직껏 마음이 소란했다. 그것이 마음을 어둡게 뒤덮어, 커프스와 나비넥타이를 바로잡음으로써 마음에 낀 구름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그 다음 조끼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연설 준비로 골자만 적은 것을 훑어보았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서 인용해 온 글을 보고 그는 망설였다. 여기 모인 청중의 머리로는 알아듣지 못할 시가 아닐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셰익스피어나 아일랜드 서정시집[토머스 모어의 시집]에서 인용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덜거덕거리는 남자들의 구두 뒤꿈치 소리며, 질질 끌며 춤을 추는 구두 밑창 소리를 듣자니 자기와는 교양 수준이 판이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시구를 인용하여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들 자기의 우월한 교양을 뽐낸다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식기실에서 처녀에게 실패했듯이 그들에게도 실패할 것만 같았다. 연설의 어조를 잘못 잡은 것이다.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다. 완전히 실패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바로 그때 그의 두 이모와 아내가 부인용 휴게실에서 나왔다. 이모들은 둘 다 키가 자그마하고 수수하게 옷을 입은 할머니들이었다. 줄리아 이모 쪽이 1인치쯤 키가 더 컸다. 귀까지 내려 가린 머리가 반백으로 변해 있었고, 넙데데하고 축 늘어진 얼굴도 군데군데 그림자가 지기는 했으나 역시 똑같은 빛이었다. 체격이 튼튼하고 자세도 꼿꼿했으나 느른한 눈과 멍하게 벌린 입술을 보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려는지 영문을 모르는 할머니 같은 표정이었다. 케이트 이모는 동생보다는 좀더 생기를 띠고 있었다. 동생보다 건강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시든 빨간 사과처럼 온통 주름투성이고 항시 똑같은 구식으로 땋아내린 머리는 무르익은 밤색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었다.
두 이모는 반가워하며 가브리엘과 키스했다. 그는 두 이모가 애지중지하는 조카이고, 항만국에 다니던 T. J. 콘로이라는 사람과 결혼한, 이미 고인이 된 언니 엘린의 아들이었다.
“그레타가 그러는데 오늘 밤으로 몽크스타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지, 가브리엘?” 하고 케이트 이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 하며 가브리엘은 아내 쪽을 보았다. “작년에 그랬다가 혼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때문에 얼마나 심한 감기에 걸렸는지 생각나지 않으세요, 케이트 이모? 마차의 유리창이 길 가는 동안 내내 덜거덕거리고, 또 메리온을 지난 다음부터는 돌풍이 불어들어와서 대단했지 뭐예요. 그 바람에 그레타는 그만 지독한 감기가 들고.”
케이트 이모는 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끝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조심해야지. 조심해서 낭패 있을라구.”
“그렇지만 그레타는 말예요, 내버려두면 이 눈 속을 걸어서라도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모님, 이 양반 말은 듣지도 마세요. 정말 말썽꾸러기랍니다. 밤에는 톰의 눈에 좋다고 파란 전등 갓을 씌우라 하고, 싫다는 애한테는 아령을 시키고, 에바한테는 억지로 오트밀을 먹인답니다, 글쎄. 아이가 가엾지 뭡니까! 오트밀을 보기만 해도 싫다는 애한테 글쎄! ……그리고 또 저한테는 어떤 것을 신게 했는지 생각도 못 하실 거예요!”
그러면서 깔깔 웃어대며 남편을 우러러보는 듯한 행복한 눈으로 옷으로부터 얼굴, 머리까지 훑어보았다. 가브리엘의 지나친 걱정은 언제나 이렇게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두 이모도 마음껏 웃어댔다.
“골로쉬랍니다!” 하고 그레타는 말을 이었다. “요새는 그거랍니다. 발 밑이 질 때에는 언제나 그걸 신어야 한다는 거예요. 오늘 저녁만 해도 날 보고 이걸 신으라느니 난 또 안 신겠다느니 했지 뭐예요, 요담엔 잠수복을 사줄 거예요.”
가브리엘은 어색한 듯이 씩 웃으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케이트 이모는 허리가 땅에 닿도록 웃어댔다. 이 농담이 그렇게까지 그녀를 웃겨주었던 것이다. 줄리아 이모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곧 사라지고, 그녀의 새침한 눈이 조카 얼굴로 똑바로 쏠렸다. 잠시 후에 그녀는 물었다.
“그런데 골로쉬가 뭐지, 가브리엘?”
“덧신 말이야, 줄리아!” 대신 그녀의 언니가 소리쳤다. “아무려면 그것도 몰라? 신 위에다 덧신는 신 말이야, 그렇지, 그레타?”
“예, 고무로 만든 거요. 우린 둘 다 한 켤레씩 있어요. 가브리엘이 그러는데 대륙에서는 누구든지 그걸 신는다지 뭐예요.”
“아, 대륙에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줄리아 이모가 중얼거렸다.
가브리엘은 이마를 찌푸리고 다소 골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다지 이상한 물건이 아닙니다. 근데 그레타는 우습게 여기며, 골로쉬란 말이 크리스티 가극단[흑인 가극단]을 연상시킨다나요.”
“그런데 가브리엘,” 하고 케이트 이모는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물론 방은 보아두었겠지? 그레타가 그러는데…….”
“아, 방은 문제 없습니다” 하고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그레샴 호텔에 하나 얻어놓았습니다.”
“그래, 그것 참 잘했다. 그리고 그레타 너 애들 걱정은 안할 테지?”
“아이, 하룻밤쯤인데요, 뭐. 더구나 베시가 잘 봐줄 거예요.”
“암, 그럴 테지.” 케이트 이모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애가 있으면 마음 든든하지! 우리 릴리는 요새 웬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전과는 딴판 달라져서 탈이야.”
가브리엘이 이 점에 관해서 이모에게 무엇을 좀 물어볼까 했으나 이모는 갑자기 말을 끊고서 계단을 내려가서 목을 길게 뽑고 난간 위를 기웃거리고 있는 동생을 보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그런데, 어디를 가? 줄리아! 줄리아! 어딜 가?”
계단 하나를 반쯤 내려간 줄리아는 다시 돌아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디가 왔수.”
그와 동시에 박수소리와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탄음(彈音)이 왈츠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응접실 문이 안에서부터 열리며 서너 쌍의 남녀가 나왔다. 케이트 이모는 가브리엘을 부리나케 딴 데로 데리고 가서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가브리엘, 미안하지만 살며시 내려가서 프레디가 괜찮은지 좀 보고 오렴. 취했거든 올려보내지 말아, 취했을 거야, 분명히. 취하고말고.”
가브리엘은 계단 쪽으로 가서 난간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식기실에서 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귀에 익은 프레디 맬린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브리엘은 소란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가브리엘이 와서 천만다행이다.” 케이트 이모가 그레타에게 말했다. “저애만 오면 늘 마음이 든든해……. 줄리아, 미스 데일리와 미스 파워에게 시원한 걸 좀 드리지그래. 훌륭한 왈츠를 춰주셔서 고마워요, 미스 데일리. 덕분에 참 좋았어.”
키가 크고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얼굴에 뻣뻣한 반백의 콧수염을 기른 거무스름한 사나이가 파트너하고 같이 지나가다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우리도 뭘 좀 마실 수 있겠습니까, 미스 모컨?”
“줄리아,” 하고 케이트 이모가 당장에 부르고 나서, “여기 계신 브라운 씨와 미스 펄롱도 함께 안내해요. 줄리아, 미스 데일리와 미스 파워도 함께 모시고 들어가지.”
“난 부인네들한테 인기가 대단하거든” 하고 브라운 씨는 콧수염이 곤두설 때까지 입을 오무리고 입가에 온통 주름살을 만들면서 싱글 웃었다. “모컨 아주머니, 부인들이 저를 좋아하시는 이유는요…….”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케이트 이모가 저리 멀리 가버린 것을 알고 그는 곧 세 젊은 부인을 데리고 뒷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에 맞대어놓은 두 개의 네모난 테이블이 있었다. 이 테이블에 줄리아 이모와 문지기 처녀가 커다란 식탁보를 펴고 있었다. 찬장에는 큰 접시, 작은 접시, 술잔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와 스푼 뭉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닫힌 피아노도 음식과 과자를 놓는 선반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 있는 조금 더 작은 찬장 앞에 두 젊은이가 서서 홉비터[홉으로 만든 쓴 술]를 마시고 있었다.
브라운 씨는 자기가 맡은 부인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서 농담 삼아 독하고 따끈한 부인용 펀치 술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술은 안 한다고 부인들이 사양하자 그는 레모네이드 세 병의 마개를 따주었다. 그러고 나서 한 청년에게 좀 비켜달라고 하고는 술병을 집어 자기 몫으로 위스키를 가득히 따랐다. 그가 시험 삼아 홀짝홀짝 마시는 동안 두 청년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눈이 둥그레서 그를 바라보았다.
“가련한 신세지” 하고 그는 싱글 웃었다. “의사의 명령이어서.”
쭈글쭈글한 얼굴이 씩 가로퍼졌다. 이 농담에 세 젊은 부인이 허리를 움켜쥐고 깔깔 웃어댔다. 그 중 제일 대담한 여자가 말했다.
“아이, 선생님두, 의사 선생님이 설마 그런 처방을 내리셨을라구요!”
브라운 씨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여자 음성을 흉내내면서 말했다.
“난 말이야, 그 유명한 캐시디 부인과 같단 말이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대지요, ‘자, 메리 그라임즈, 내가 안 마셔도 억지로라도 마시도록 권해라. 나는 아무래도 마시고 싶으니까’라고.”
술기가 거나한 얼굴을 너무 친한 체하고서 앞으로 내밀고 천한 더블린의 말투를 썼기 때문에 젊은 부인들은 하나같이 본능적으로 잠자코 그의 말에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메리 제인의 문하생 중 하나인 미스 펄롱은 미스 데일리에게 아까 친 그 아름다운 왈츠 곡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브라운 씨는 자기가 무시를 당했다고 깨닫자 그래도 자기를 여자들보다는 좀더 알아줄 듯한 두 청년 쪽으로 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때 보랏빛 옷을 입고 얼굴이 빨간 젊은 여자 하나가 흥분된 표정으로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카드리유! 카드리유[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추는 고대식 춤]를 춥시다!”
케이트 이모가 곧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외쳤다.
“남자 두 분에 여자 넷인데, 메리 제인!”
“아니, 여기 버긴 씨와 케리건 씨가 계시잖아요! 케리건 씨, 미스 파워하고 짝이 되시겠어요? 미스 펄롱, 당신 파트너는 버긴 씨가 어때? 자, 그럼 이젠 다 됐군.”
“아직도 여자는 셋인데, 메리 제인” 하고 케이트 이모가 말을 받았다.
두 청년이 부인들에게 잘 부탁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는 동안 메리 제인은 미스 데일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 미스 데일리, 두 곡이나 댄스곡을 춰주신 뒤에 또 부탁드리기가 죄송하지만 오늘 밤은 여자 손님 수가 너무 모자라서요.”
“괜찮아요, 미스 모컨.”
“그런데 좋은 파트너가 계십니다. 바텔 다아시 씨, 테너 가수예요. 나중에 노래를 하나 부탁드리겠어요. 더블린 장안이 그분 때문에 떠들썩하다니까요.”
“참 좋은 목소리지!” 케이트 이모도 맞장구를 쳤다.
피아노가 무도곡의 전주를 두 번 되풀이하자, 메리 제인은 새로 모은 사람들을 서둘러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줄리아 이모가 뒤를 돌아보면서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왜 그래, 줄리아? 누구 때문에 그래?” 그 꼴을 보고 케이트 이모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냅킨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던 줄리아는 언니를 바라보며 뜻밖의 물음이라는 듯이 다만 한마디 슬쩍 말했다.
“프레디야, 가브리엘하고 함께야.”
정말 바로 자기 뒤에서 가브리엘이 프레디 맬린즈를 데리고 층계참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프레디는 마흔쯤 된 사나이로 키나 몸집이 가브리엘만 하고 어깨가 매우 둥글었다. 얼굴은 퉁퉁하고 창백하며, 다만 두툼하게 축 늘어진 귀뿌리와 넓적한 코 양쪽 끝에만 불그스름한 빛이 돌았다. 용모가 거칠게 생겼으며, 뭉뚝한 매부리코, 툭 불그러지고 까진 이마, 부어오른 듯이 두꺼운 쑥 내민 입술,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과 헝클어진 얇은 머리 때문에 졸린 것같이 보였다. 그는 계단을 올라오면서 아까 가브리엘에게 하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집이 떠나가라고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왼쪽 손등으로 왼눈을 연방 부비고 있었다.
“어서 와, 프레디.” 줄리아 이모가 먼저 인사를 했다.
프레디 맬린즈는 모컨 자매에게 인사를 했으나, 목소리가 가다가 콱 막히는 것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퉁명스럽게 내던진 말같이 들렸다. 그러다 찬장 있는 데서 브라운 씨가 이쪽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비틀거리면서 방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가 조금 전 가브리엘에게 한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되풀이했다.
“그다지 심하진 않나 본데, 그렇지?” 케이트 이모가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가브리엘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금세 침울한 빛을 걷어버리고서 대답했다.
“네, 별로 심하진 않군요.”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저의 어머니가 섣달 그믐에 금주의 맹세를 시켰다던데, 그건 그렇고, 가브리엘, 응접실로 가자, 어서.”
가브리엘과 방을 떠나기 전에 케이트 이모는 브라운 씨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브라운 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녀가 나가버리자 프레디 맬린즈에게 말했다.
“자, 그럼, 프 공(公), 레모네이드를 한 잔 잘 따라드릴 테니 기운 좀 차리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온 프레디 맬린즈는 귀찮다는 듯이 이 제안에 손을 저었으나, 브라운 씨는 우선 흩어진 옷부터 고치라고 프레디 맬린즈의 주의를 끈 다음에 레모네이드를 넘치도록 따라서 그에게 주었다. 프레디 맬린즈는 왼손으로 기계적으로 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을 바로 잡는 데 바빴다. 브라운 씨의 얼굴은 웃느라고 다시 한번 쭈글쭈글해졌다. 그는 자기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한편 프레디 맬린즈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채 오기도 전에 기관지염에 걸린 듯 쿨렁거리면서 목이 터져라고 몸을 뒤틀어 웃더니, 입에 대지도 않은 철철 넘치는 잔을 도로 내려놓고, 왼손 등으로 왼쪽 눈을 부비며, 웃음의 발작이 새어나오는 그 사이사이에 방금 한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가브리엘은 메리 제인이 물을 뿌린 듯 조용한 응접실에서 매우 빠른 장식음부(裝飾音符)와 어려운 악절(樂節)투성이인 〈아카데미〉 곡을 치는 동안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치고 있는 곡에는 멜로디가 없는 것같이 들렸고, 그녀에게 한 곡 쳐달라고 청한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는지 의심스러웠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식당에서 나와 문간에 서서 듣고 있던 네 청년도 잠시 듣다가 짝을 지어 조용히 가버렸다. 그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은 두 손을 건반 위로 달리다가 주문을 외우는 순간의 여사제의 두 손처럼 쉼표가 있는 데서 번쩍 손을 쳐들고 멈추는 메리 제인과, 곁에 서서 악보장을 넘겨주고 있는 케이트 이모뿐이었다.
묵직한 샹들리에 밑에서 초칠을 해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 때문에 눈이 부셔서 가브리엘의 눈은 피아노 위 벽 쪽으로 움직여 갔다. 거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 사진이 걸려 있고, 그 곁에는 런던탑에서 살해된 두 왕자[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은 후 두 왕자가 암살되어 리처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것은 줄리아 이모가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털실로 처녀시절에 수놓은 것이었다. 이모들이 학교에 다니던 그 소녀 시절에 저런 수예를 아마 한 해 동안 가르쳤는지도 몰랐다. 그의 어머니가 언젠가 생일 선물로 보랏빛 태비니트 천의 조끼를 만들어준 일이 있는데, 거기도 조그만 여우 머리를 수놓고, 갈색 새틴으로 안을 대고 뽕나무 열매의 동그란 단추가 달려 있었다. 케이트 이모는 늘 모컨 집안에서 어머니가 가장 머리가 좋았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가 음악적 소질이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케이트 이모와 줄리아 이모는 둘 다 착실한 데다 의젓하고 헌칠한 이 언니를 늘 자랑으로 삼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의 사진이 창과 창 사이의 벽에 걸린 거울 앞에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무릎에 책을 펴놓고, 세일러복을 입고 발 아래 누워 있는 콘스탄틴에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들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이 어머니였다. 집안의 체면에 대하여 퍽이나 마음을 썼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덕택으로 콘스탄틴은 지금 밸브리건[더블린 북방의 작은 해안 도시]에서 상석부사제(上席副司祭)로 있고, 또 가브리엘도 왕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자기의 결혼 문제에 반대하던 일이 생각나서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머니가 한 모욕적인 말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레타를 가리켜 촌뜨기 말괄량이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레타에게 전혀 당치 않은 말이었다. 몽크스타운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가 마지막 병에 걸려 오래 앓을 때 끝까지 어머니를 간호해 드린 것은 그레타였다.
그는 메리 제인이 치는 곡이 거의 끝에 가까워오나 보다고 짐작했다. 첫머리의 멜로디를 다시 치면서 소절 끝마다 빠른 장식적 악구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의 노여움이 사라져갔다. 고음부의 옥타브 전음을 몇 번 치고, 최종 악장의 저음부를 마지막으로 우렁차게 치자 연주는 끝났다.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일어나고, 메리 제인은 얼굴이 빨개져 안절부절못하며 악보를 말아쥐고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가장 열렬한 박수는 연주가 시작하자 식당으로 갔다가 피아노 소리가 끝난 것을 듣고 문간에 와 선 그 네 명의 청년이 보낸 것이었다.
랜서[카드리유의 일종인 무도]의 준비가 되었다. 가브리엘은 미스 아이버즈와 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솔직하고 말이 많은 젊은 여자로, 주근깨 얼굴에 갈색 눈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가슴까지 파인 옷을 입지 않았고, 칼라 앞에 꽂은 커다란 브로치에는 아일랜드 고유의 명구와 격언이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이 무도의 제자리에 서자마자 그녀는 다짜고짜로 따지고 들었다.
“톡톡히 따져볼 말이 있어요.”
“나한테요?”
여자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여자의 심각한 태도에 미소를 지으면서 가브리엘은 재차 물었다.
“G.C.가 누구예요?”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며 미스 아이버즈는 반문했다.
가브리엘이 얼굴이 빨개져서 모른다는 시늉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려고 하는데 여자는 다시 뾰로통해서 쏘아붙였다.
“아니, 시침 떼지 마세요! 선생님이 《데일리 익스프레스》[런던에서 내는 보수파 신문]에 글을 써내신다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어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무엇 때문에 부끄럽습니까?” 하고 가브리엘은 반문하고서 눈을 껌벅거리며 억지로 웃어보려고 했다.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인데. 선생님이 그런 신문에 글을 쓰세요? 선생님이 친영파이신 줄은 몰랐어요” 하고 미스 아이버즈는 기탄 없이 쏘아붙였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가브리엘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가 매주 수요일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문학란에 글을 써서 15실링의 고료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친영파가 될 까닭은 없었다. 비평을 써달라고 부쳐오는 책들은 몇 푼 안 되는 고료인 수표보다 거의 몇 갑절이나 반가웠다. 신간의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책장을 넘겨보는 것이 무척 기뻤다. 거의 날마다 대학에서 강의가 끝나면 부둣가에 있는 헌책방, 즉 배철러 가의 히키 서점, 애스튼 부두에 있는 웨브 서점이나 매시 서점, 혹은 뒷골목에 있는 오클로이시 서점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곤 했다. 이 여자의 공격을 어떻게 응수해야 좋을지 몰랐다. 문학은 정치를 초월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여자와는 오랫동안 친구였으며, 경력도, 처음에 대학에 다닐 때도, 다음에 학교 교사로 있는 지금도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과장된 말을 감히 쓸 수는 없었다. 그냥 연달아 눈을 껌벅거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그는 서평을 쓴다고 해서 정치적일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시원치 않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바꿔야 할 차례가 와도 그는 아직 어리둥절하고 마음이 산란했다. 미스 아이버즈는 재빨리 그의 손을 차분히 잡고,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아까는 농담이었어요, 자, 바꾸어 서요.”
둘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대학 이야기를 꺼내어서 가브리엘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자기 친구 중의 하나가 그녀에게 가브리엘이 브라우닝의 시에 대한 평을 쓴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을 알게 된 것이지만 그 평이 마음에 퍽 들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별안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참, 콘로이 선생님, 이번 여름에 아일랜드 섬[본토 서해안에 있는 원시적인 아일랜드의 한 섬. 아직도 겔틱 말을 쓴다]으로 놀러가시지 않겠어요? 우린 거기서 아주 한달 동안 꼬박 있을 예정이에요. 대서양 바깥 바다는 참 근사할 거예요, 꼭 가세요. 클랜시 씨도 간대요. 그리고 킬켈리 씨와 캐들린 키어니도 가구요. 그레타도 가면 그분에게도 대단히 좋을 거예요. 부인 고향이 코나하트지요?”
“친정이 그렇지요.” 가브리엘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시지요?” 하고 미스 아이버즈는 따뜻한 자기 손으로 그의 팔을 열심히 잡으면서 조르듯 말했다.
“사실은 어디로 가기로 약속한 곳이 있는데요…….”
“어디로요?” 하고 미스 아이버즈가 다그쳐 물었다.
“저, 해마다 몇몇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합니다…….”
“어디루요?”
“글쎄, 늘 프랑스가 아니면 벨지움이거나 아니면 독일이 될지도 모르죠.” 가브리엘의 대답은 어색했다.
“근데 왜 프랑스와 벨지움으로 가시죠? 자기 나라를 보시지 않고.”
“글쎄요, 그 하나는 그 나라의 말을 익히려는 이유도 있고, 또 하나는 기분전환을 해보자는 뜻도 있지요.”
“그러면 선생님 자신의 나라 말은 익히실 필요가 없다는 거죠?―― 아일랜드어 말예요?”
“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일랜드어는 내 국어가 아닙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이 힐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안절부절못하며 좌우를 돌아보고 이 난처한 처지에서도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으나 이마에까지 붉은 빛이 번져갔다.
“선생님, 조국 땅은 가볼 곳이 없다는 건가요? 전혀 모르고 계시는 자기 민족, 자기 나라는요?”
“아아,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조국이 싫어졌습니다, 지긋지긋해요” 하고 가브리엘은 갑자기 쏘아붙였다.
“아니, 왜요?”
가브리엘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도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요?” 미스 아이버즈가 재차 물었다.
둘이 같이 놀러가야만 하겠는데, 가브리엘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므로 미스 아이버즈는 이번에는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대답을 못 하실 거예요.”
가브리엘은 몹시 힘을 주어 춤을 추면서 마음의 동요를 감추려 했다. 여자의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이 보였으므로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길게 늘어선 줄에서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여자가 그의 손을 꾹 눌러주는 것을 느끼고서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잠시 유심히 그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는 씨익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줄이 다시 움직이려고 할 찰나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친영파!”
랜서 춤이 끝나자 가브리엘은 프레디 맬린즈의 어머니가 앉아 있는 저 먼 구석으로 갔다. 프레디의 어머니는 듬직하게 생긴 기운 없어 보이는 백발 노인이었다. 음성은 아들의 그것처럼 목에 걸리는 소리를 내고 게다가 말을 좀 더듬었다. 아들 프레디가 아까부터 와 있다는 이야기도 이미 듣고 있었고, 또 그다지 취해 있지 않다는 이야기도 이미 듣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 오셨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이 노파는 글라스고에서 시집간 딸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해마다 한번씩 더블린에 다니러 오는 것이었다. 바다는 아주 잔잔하고, 선장 또한 아주 친절하게 살펴주더라고 노파는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노파는 또 글라스고에 있는 딸의 집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며, 거기서 사귄 딸의 친구들 이야기도 했다.
노파가 마음껏 지껄이는 동안 가브리엘은 미스 아이버즈와의 불쾌한 기억을 모두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물론 그 처녀, 아니 부인은 이름이야 어찌 되었건 아일랜드광이지만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아마 내가 그렇게 대답을 하지 않았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여자는 농담으로라도 남들 앞에서 나를 친영파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 저 여자는 토끼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따지고 남들 앞에서 놀림감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나.
왈츠를 추는 여러 쌍의 남녀 사이를 뚫고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아내가 보였다. 그의 앞에까지 오자 아내는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여보, 케이트 이모님께서 여느 때처럼 당신이 거위 고기를 베어서 나눠주지 않겠느냐는 분부예요. 미스 데일리가 햄을 썰고, 나는 푸딩을 맡겠어요.”
“그러지.”
“이 왈츠가 끝나는 대로 젊은 축들을 먼저 불러서 우리는 우리끼리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하시겠대요.”
“당신도 춤 좀 추었소?”
“그럼요, 추고말고요. 못 보셨수? 몰리 아이버즈하곤 무슨 말다툼을 하셨어요?”
“말다툼은 무슨 말다툼. 왜? 그 여자가 그럽디까?”
“그런 것처럼 말하던데요. 저 다아시 씨에게 내가 노래를 시킬게요. 자부심이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애요.”
“말다툼한 게 아니야” 하고 가브리엘은 침울한 말투로 말했다. “그저 아일랜드 서부지방으로 여행을 가자는 것을 내가 싫다고 했을 뿐이야.”
이 말에 아내는 좋아라고 두 손을 서로 꼭 맞잡고 깡충 뛰어올랐다.
“아, 가요, 여보” 하고 음성을 높였다. “골웨이[아일랜드 서해안에 있는 도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요.”
그녀는 잠시 남편을 쳐다보다가 맬린즈 할머니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할머니한텐 제법 착하게 구는군요, 맬린즈 할머니?”
아내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시 방 저쪽으로 돌아가는 동안 맬린즈 할머니는 이야기가 중단되었던 것도 개의치 않고 가브리엘에게 스코틀랜드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많으며, 경치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계속 이야기했다. 사위가 해마다 자기와 딸을 호수로 데리고 가서 늘 낚시질을 했다는 것과, 사위는 낚시질을 썩 잘하여 어느 날은 아름다운 큰 고기를 잡아서 그것을 호텔 사람이 요리해주어 저녁에 잘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브리엘은 노파의 이야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찬 시간이 다가와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연설과 인용하려는 시구를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레디 맬린즈가 자기 어머니를 보러 방 안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서 가브리엘은 그에게 의자를 비워주고 창가로 물러섰다. 방은 벌써 텅 비어 있고, 뒷방에서는 접시며 나이프가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댄스에 지친 듯 여기저기 조그만 떼를 짓고 조용히 잡담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따뜻한 떨리는 손가락은 차디찬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바람은 얼마나 시원할까! 우선 강가를 따라 다음은 공원으로 들어가 혼자 걸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눈이 나무들 가지마다 하얗게 내려 웰링튼 기념비[웰링튼은 아일랜드 태생] 꼭대기에는 은빛 모자가 생겼겠지. 만찬의 식탁보다는 거기가 얼마나 더 기분이 좋을까!
그는 자기가 할 연설의 서두를 죽 훑어보았다. 아일랜드인의 친절성, 슬픈 추억들, 세 여신, 패리스, 그리고 브라우닝의 시구 인용. 그가 서평에서 이미 썼던 말, ‘사색에 고민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 있다’는 말을 자신에게 다시 되뇌어보았다. 미스 아이버즈가 그 서평을 칭찬한 것인데, 진심에서였을까? 아일랜드를 사랑한다고 저렇게 떠들어대는 그 이면에는 정말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인생이 있을까? 서로 상호간에 불쾌한 일이 있기란 오늘 저녁이 처음이다. 자기가 연설하는 것을 들으며 식탁에 딱 버티고 앉아서 그 여자가 그 비판적이고 놀리는 듯한 눈으로 바라볼 것을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렸다. 연설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아마 그 여자는 안됐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테지.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 하나가 머리에 떠올라 용기가 생겼다. 케이트 이모와 줄리아 이모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하자.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서 이제 쇠퇴해가고 있는 세대, 그 세대도 결점은 있었을지 모르나, 제 생각 같아서는 환대, 유머, 인정 같은 어떤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우리 주위에서 지금 자라나고 있는 새롭고 아주 진실하고 고도로 교육을 받은 세대에는 없는 것같이 저에게는 생각됩니다.” 좋다. 이건 미스 아이버즈한테 들으라는 소리다. 두 이모가 무식한 두 노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냐?
방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브라운 씨가 줄리아 이모를 공손히 모시고 문에서 들어오는데, 줄리아 이모는 그의 팔에 매달려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줄리아 이모가 피아노 있는 데까지 가는데 그때까지 불규칙한 소총소리 같은 박수갈채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메리 제인이 피아노에 마주앉고, 미소를 이미 거둔 줄리아 이모가 방 안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상당히 잘 들리게 몸을 반쯤 돌리자 박수소리는 점점 잔잔해졌다. 전주곡은 가브리엘이 이미 알고 있는 곡이었다. 줄리아 이모가 옛날에 잘 부르던 ―― 〈신부로 단장하고〉라는 노래였다. 줄리아 이모의 우렁차고 맑은 목소리는 피아노의 빠른 장식음보다 높이 힘차게 솟아나며, 아주 빠르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조그만 장식 음부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노래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음성만을 듣고 있으면 경쾌하고도 무난히 흐르는 노래의 흥을 나누어 느낄 수가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가브리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저편 방에서 식사하는 보이지 않는 식탁에서도 우렁찬 박수소리가 흘러왔다. 박수소리가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것같이 들려서 줄리아 이모가 낡은 가죽 표지에 자기 약자 이름을 새긴 노래책을 악보대에 다시 놓으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그 얼굴에 붉은색이 약간 퍼졌다. 노래를 남보다 더 잘 들으려고 머리를 한쪽으로 비뚜름히 숙이고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프레디 맬린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쳤는데도 혼자 여전히 박수를 보내며 그의 어머니에게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엄숙하고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시했다. 드디어 그 이상 더 박수를 칠 수 없게 되자 그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 줄리아 이모 쪽으로 걸어가 줄리아 이모의 한 손을 자기 두 손 사이에다 꼭 껴안고서 말이 막히거나 목소리가 갈라져서 답답할 적마다 그 손을 마주 흔들어댔다.
“이제 방금 우리 어머니에게도 말했지만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는 건 처음 듣습니다. 오늘 밤처럼 목소리가 좋으시긴 처음입니다. 자! 이 말을 믿으시겠어요? 정말입니다. 진정코 사실입니다. 음성이 그렇게까지 생생하고, 그렇게…… 그렇게 맑고, 생생한 노래를 듣기란 한번도 없었어요, 한번도.”
줄리아 이모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며 과찬이라는 뜻의 말을 뭐라고 중얼거렸다. 브라운 씨는 줄리아 이모 쪽으로 한 손을 뻗쳐 굉장한 구경거리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흥행사와 흡사한 몸짓으로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줄리아 모컨 여사, 나의 최근의 발견!” 하고 혼자 아주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그때 프레디 맬린즈가 그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옳지, 브라운, 자네가 거꾸로 서도 이런 발견은 못 해.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 절반만 한 노래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것만은 솔직한 사실이야.”
“나도 그래.” 브라운 씨도 맞장구를 쳤다. “음성이 아주 많이 나아진 것 같군그래.”
이 말에 줄리아 이모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점잖은 자존심을 잃지 않고 말했다.
“음성은 30년 전에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지요.”
“자주 줄리아한테 한 말이지만” 하고 케이트 이모가 어세를 높였다. “줄리아는 그저 합창대에서 썩어버렸다구. 그런데도 줄리아는 내 말이라면 듣기 싫어하지 뭐야.”
그녀는 고집이 센 아기에 대하여 남의 판단을 구해야 할 때처럼 사람들을 돌아보았으나 한편 줄리아 이모는 앞만 응시하고 있었는데, 추억을 더듬는 막연한 미소가 얼굴에 떠돌고 있었다.
“글쎄 저,” 하고 케이트 이모는 말을 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간에 그 성가대에서 노예처럼 일만 하면서 남의 말이라곤 아무의 말도 안 듣지 뭐유. 밤낮 일만 하면서. 크리스마스 아침엔 글쎄 아침 여섯시부터! 그리고 그게 다 뭣 때문이지?”
“글쎄, 그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케이트 고모?” 메리 제인이 피아노 의자 위에서 몸을 비틀고 생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케이트 이모는 사납게 조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란 것도 잘 안다. 얘야, 메리 제인. 하지만 일생을 바쳐서 일해 온 여자들을 성가대에서 몰아내시고 그 대신 노래라곤 부를 줄도 모르는 젖내나는 조무래기 애녀석들을 위에 올려앉히신 처사는 교황님이라도 잘하신 일이라곤 할 수 없어. 교황님이 하신 일이니까 성당을 위한 일이기야 하겠지만 공평치 않아. 메리 제인, 그건 정당치 못한 일이다, 옳지 못해.”
자기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에 케이트 이모는 발끈 화를 내면서 계속해서 동생을 옹호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 제인은 손님들이 춤을 추려고 모두 돌아온 것을 보고서 달래듯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케이트 고모님, 브라운 씨한테 실례가 되지 않겠어요, 종파가 다르신 분인데.”
자기 종교에 관한 이런 얘기를 듣고서 히죽거리고 있는 브라운 씨를 돌아보며 케이트 이모는 빠른 말로 이렇게 말했다.
“아, 교황님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오 난. 난 그저 못난 늙은이니까 감히 그런 일을 할 엄두도 못 내지. 그러나 그저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아니 저 예절이니 감사니 하는 그런 게 있지 않느냐 말이야. 내가 줄리아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힐리 신부님한테 마주대고 말하겠어…….”
“그뿐이겠어요, 케이트 고모님” 하고 메리 제인이 대꾸했다. “우린 모두가 시장해요. 그리고 시장할 땐 언쟁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또 목이 마를 때도 언쟁이 있게 마련이지요” 하고 브라운 씨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저녁 식사를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메리 제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그후에 끝내기로 하시고.”
응접실 밖의 층계참에서 가브리엘은 자기 아내와 메리 제인이 미스 아이버즈에게 저녁 식사나 하고 가라고 만류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벌써 모자도 쓰고, 이제 외투 단추를 끼우고 있는 미스 아이버즈는 더 머물지 못하겠다고 하며, 자기는 조금도 시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벌써 너무 오래 지체했다고 사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단 10분만이라도 있다 가요, 그렇다고 늦을 건 없잖아.” 콘로이 부인이 말했다.
“춤을 춘 뒤니 조금이라도 뭘 드시고 가시지.” 메리 제인도 한마디 했다.
“정말 안 되겠어요.” 미스 아이버즈도 지질 않았다.
“아주 재미를 못 보셨나 봐.” 하는 수 없다는 투로 메리 제인이 말했다.
“참 재미 있었어요, 정말. 그렇지만 이젠 정말이지 날 좀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집에까지 가지?” 콘로이 부인이 물었다.
“아이, 강가로 두어 발자국만 올라가면 금센데요 뭐.”
가브리엘이 순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미스 아이버즈, 정말 가셔야만 한다면 바래다 드리지요.”
그러나 미스 아이버즈는 뿌리치고 내려서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발 들어들 가셔서 식사를 하세요, 제 염려는 마시고. 제 일은 제가 넉넉히 할 수 있으니까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군, 몰리.” 콘로이 부인이 기탄없이 쏘아붙였다.
“빈낙트 리브[아일랜드 말로 안녕이라는 뜻]”라고 인사말을 남기고 높이 웃으며 미스 아이버즈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메리 제인은 얼굴에 침울한 까닭 모를 표정을 띠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며, 한편 콘로이 부인은 난간에 기대 서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브리엘은 미스 아이버즈가 갑자기 떠나게 된 원인이 자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기분이 나쁜 것같이 보이진 않았다 ―― 웃으면서 떠나지 않았던가. 그는 얼빠진 듯이 계단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케이트 이모가 식당에서 부리나케 뛰어나오며, 이게 어떻게 된 셈이냐는 듯이 손을 마주 비비댔다.
“이 사람 가브리엘은 어디 갔지?”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가브리엘은 어디 간 거야? 다들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준비가 다 됐는데, 거위 고기를 잘라 나눠줄 사람이 없으니!”
“여기 있어요, 이모님!” 갑자기 명랑해지며 가브리엘이 큰 소리로 대꾸했다. “필요하다면 거위쯤은 몇 마리라도 잘라드리겠습니다.”
식탁 한 끝에 살찐 누런 거위 한 마리가 놓여 있고, 또 한쪽 끝에는 크리스드 페이퍼[쪼글쪼글 주름이 간 조화용 색종이]를 펴고 파슬리의 잔가지를 늘어놓은 위에 겉껍질을 벗기고 빵가루를 뿌린 커다란 햄이 한 덩이 놓여 있었다. 그 정갱이 주위로는 알뜰한 빨간 종이로 장식하고, 그 옆으로는 양념을 한 쇠고기 덩어리가 쌓여 있었다. 이 상반되는 양면 끝 사이에는 두 줄로 작은 요리 접시들이 늘어 서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성당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젤리, 하얀 크림과 빨간 잼 덩어리가 가득 든 얕은 접시 하나, 자줏빛 건포도와 껍질을 까놓은 아몬드를 담은 줄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초록색 잎사귀 모양의 접시, 스미르나 무화과를 네모나게 쌓아올린 또 하나의 같은 모양의 접시, 너트멕(육두구)을 갈아서 위에 덮은 커스터드 접시, 금종이 은종이에 싼 초콜릿과 사탕을 가득 담은 작은 사발, 그리고 셀러리 줄기를 몇 개 꽂은 유리 항아리들이 있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오렌지와 미국 사과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올린 과일 쟁반, 그것을 지키는 보초병처럼 두 개의 납작한 커트글라스의 구식 술병, 한 병에는 포트와인이 들어 있고, 다른 한 병에는 검은 셰리주가 들어 있었다. 뚜껑이 닫힌 네모진 피아노 위에는 엄청나게 큰 누런 접시에 담은 푸딩이 기다리고 있고, 그 뒤로는 스타우트 흑맥주와 에일주와 탄산수 병들이 군복의 색깔에 따라 세 분대로 정렬이 되어 있었다. 처음 두 분대는 갈색과 빨간 딱지가 달린 까만색이고, 세번째의 제일 작은 분대는 하얀 바탕에 초록색 견장을 달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대담하게 테이블 웃자리에 앉아 칼날을 살펴본 다음에 포크를 거위 살 속으로 푹 찔렀다. 그는 이제는 마음이 아주 놓였다. 고기를 자르는 데에는 능숙했고, 잘 차려놓은 식탁 머리에 앉는 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스 펄롱, 뭘 드릴까요?” 하고 그는 물었다. “날개를 드릴까요, 가슴살을 드릴까요?”
“가슴살을 아주 조금만요.”
“미스 히긴즈는요?”
“아아, 무엇이든 괜찮아요.”
가브리엘과 미스 데일리가 거위 접시와 햄과 양념 쇠고기 접시를 돌리는 동안, 릴리는 이 손님 저 손님에게로 다니며 흰 냅킨에 싼 뜨겁고 바삭바삭한 감자를 담은 접시를 권하고 있었다. 이것은 메리 제인이 생각해 낸 것이었고, 그녀는 또 거위 고기에도 애플 소스를 쓰자고 제안했으나 케이트 이모는 애플 소스를 치지 않고 그냥 구운 거위 고기만도 자기 입에는 늘 간이 맞는다고 하며, 자칫하면 더 맛이 나빠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메리 제인은 자기 제자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가장 좋은 조각을 집어주었으며, 케이트 이모와 줄리아 이모는 남자 손님들에게는 스타우트와 에일 병을, 여자 손님들에게는 탄산수 병을 따서 피아노로부터 날라왔다. 혼잡과 웃음소리와 소음 ―― 무엇을 보내라는 소리와 무엇을 보내라는 사람에게 무엇을 달라는 소리, 나이프와 포크 소리, 코르크 마개와 유리 마개를 따는 소리들이 뒤범벅이 되어 떠들썩했다. 가브리엘은 한번 죄다 나눠주고 나자 자기는 먹지 않고 두번째 것을 잘라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야단을 치고, 또 고기 자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못 이기는 체하고서 스타우트를 한 모금 길게 들이켰다. 메리 제인은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으나, 케이트 이모와 줄리아 이모는 아직까지도 서로 뒤를 쫓아다니며, 맞부딪치기도 하고 서로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 말을 타이르기도 하면서 식탁 주위를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다. 브라운 씨가 제발 좀 앉아서 식사를 하라고 간청했고, 가브리엘도 역시 간청했으나 두 이모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 걱정 말라고 막무가내였으므로, 프레디 맬린즈가 기어이 일어나서 케이트 이모를 붙잡아다가 일동이 떠나가게 웃는 가운데 의자에 억지로 앉혔다.
모두에게 충분히 고기를 나눠준 다음에 가브리엘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어느 분이든지 막말로 말해서 터지게 좀더 잡숫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어서 식사를 들라고 권했고, 또 릴리는 그를 위해 남겨두었던 감자 세 개를 가지고 왔다.
“그러시다면” 하고 가브리엘은 상냥하게 말하면서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또 한 모금 마셨다.
“여러분, 잠시 동안만 저를 없는 것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는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릴리가 접시를 치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떠들어대는 대화에는 끼지도 않았다. 화제는 때마침 왕립극장에서 공연중인 오페라단 이야기였다. 테너 가수이며, 멋진 콧수염을 기른 얼굴색이 검은 청년인 바텔 다아시 씨는 그 오페라단의 제1콘트랄토 소프라노 가수를 극찬했으나, 미스 펄롱은 그 가수의 연기에 기품이 좀 없는 것 같더라고 했다. 프레디 맬린즈는 게이어티 극단의 무언극 2부에서 노래하는 흑인 추장이 일찍이 자기가 듣던 중 가장 훌륭한 음성을 가진 테너 가수이더라고 했다.
“들어보셨어요?” 하고 그는 식탁 저쪽에 앉은 바텔 다아시 씨에게 물었다.
“아뇨” 하고 바텔 다아시 씨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왜 그러냐 하면,” 하고 프레디 맬린즈가 설명했다. “그 사람에 대한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난 그 사람이 훌륭한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훌륭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프레디뿐이지요”라고 브라운 씨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 왜 그 사람인들 음성이 좋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검둥이라서 그러는 건가요?” 프레디 맬린즈가 톡 쏘아붙였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메리 제인이 다시 화제를 아까 하던 오페라 이야기로 옮겼다. 어느 제자 하나가 초대권을 갖다주어서 〈미뇽〉을 구경했는데, 물론 아주 좋았지만, 듣고 있자니까 가엾은 조니나 번즈[더블린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 생각이 자꾸만 나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브라운 씨는 더 오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옛날에 더블린에 늘 오곤 했던 이탈리아 오페라단 이야기를 꺼냈다 ―― 티에트젠스, 일마 데 무르즈카, 캄파니니, 데 트레벨루, 지우글리니, 라벨리, 아람브로 등등 더블린에서 노래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또 옛날에는 왕립극장 꼭대기층까지 밤마다 초만원이 되고, 어느 날 저녁에 이탈리아 테너 가수 한 사람이 〈병사답게 죽으련다〉를 불러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받았으며, 그때마다 번번이 고음 C로 불렀다는 이야기며, 또 어떤 때는 오페라에 왔던 젊은패들이 너무도 열광하여 어느 주역 여배우가 타고 온 마차에서 말을 끌어내고, 대신 자기들이 호텔까지 마차를 끌고 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왜 요새는 〈디노라〉니 〈루크레치아 불지아〉와 같은 오래된 대오페라를 공연하지 않을까요? 그런 음성을 가진 가수들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하고 여기서 말을 맺었다.
“천만에요” 하고 바이텔 다아시 씨가 말을 받았다. “내가 보기엔 지금도 옛날이나 다름없이 훌륭한 가수들이 있습니다.”
“어디 있단 말입니까?” 브라운 씨가 날카롭게 물었다.
“런던이나 파리나 밀란 같은 데에요.” 바텔 다아시 씨도 지질 않았다. “예를 들자면 카루소 같은 가수는 이제 선생께서 말씀하신 사람 중 그 누구보다 낫다고는 못할망정 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이 믿어지지 않는데요, 난.”
“아, 저 같은 사람은 카루소의 노래를 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하고 메리 제인이 끼어들었다.
“내 보기엔,” 하고 아까부터 뼈에 붙은 고기를 뜯고 있던 케이트 이모도 한마디 했다. “내 마음에 드는 테너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어. 내 듣기엔 그렇더란 말이야. 근데 여기 있는 사람 중 그 사람 얘길 들어 본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걸.”
“누군데요, 아주머니?” 바텔 다아시 씨가 공손히 물었다.
“파킨슨이라는 이름의 가수였는데, 내가 들었을 땐 그분이 한창때였다우.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로는 이만큼 순수한 테너도 없다고 생각해요, 난.”
“이상한데요” 하고 다아시 씨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그 사람의 이름도 못 들었는데요.”
“그래 그래, 미스 모컨의 말씀이 옳아” 하고 브라운 씨가 끼어들었다. “나도 예전에 파킨슨의 노래를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옛날의 일입니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곱고, 부드러운 영국의 테너 가수였지” 하고 케이트 이모는 열성어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이 식사를 끝마치자, 이번에는 커다란 푸딩이 식탁으로 옮겨졌다. 다시 포크와 스푼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브리엘의 아내가 푸딩을 스푼으로 듬뿍듬뿍 떠서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돌렸다. 그것을 식탁 가운데쯤 앉았던 메리 제인이 받아서 산딸기며, 오렌지 젤리며, 브랑망주며, 잼 같은 것을 더 담아서 돌렸다. 이 푸딩은 줄리아 이모가 만든 것이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본인은 색깔이 좀더 누랬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글쎄, 저, 모컨 아주머니, 내가 대신 갈색이 됐다고 해두시지요. 아시다시피 제 이름이 브라운이니까요” 하고 브라운 씨가 익살을 부렸다.
모든 남자 손님들은 가브리엘만 빼놓고 줄리아 이모에 대한 인사로 푸딩을 얼마씩 먹었다. 가브리엘은 단 것을 절대로 먹지 않았기 때문에 셀러리를 그에게 남겨놓아 두었었다. 프레디 맬린즈도 셀러리 줄기를 집어들어 푸딩과 함께 먹었다. 그는 셀러리가 피에 제일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마침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식사중 내내 아무 말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은 일주일 내에 맬러리 산으로 휴양을 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화제를 맬러리 산으로 옮겨, 그곳의 공기는 말할 것도 없이 신선하다는 둥, 수도승들도 매우 친절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에게서 한 푼도 구걸하는 법이 없다는 둥 여러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하고 브라운 씨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거기 가서 호텔이나 되는 것처럼 숙박하고 산해진미로 호강하다가 돈 한 푼도 안 내고 돌아와도 괜찮다는 이야긴가요?”
“아, 대개 사람들은 떠날 때에는 수도원에 희사는 하지요.” 메리 제인이 이렇게 하는 말을 브라운 씨가 또 나직이 받았다.
“우리 성당에도 그런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수도사들이 서로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새벽 두시에 일어나며 관 속에 들어가서 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느냐고 그는 물었다.
“그게 수도원의 규칙이지 뭐야” 하고 케이트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요, 근데 왜 그럴까요?” 브라운 씨는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은 모양이다.
케이트 이모는 그것이 규칙이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브라운 씨는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프레디 맬린즈가 수도사들은 외부 사회에서 사는 모든 죄인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려는 것이라고 되도록 열심히 그에게 설명했다. 이 설명도 그다지 석연치 않아서 브라운 씨는 그저 히죽거리며 말할 뿐이었다.
“그건 매우 좋은 생각이지만 편안한 스프링이 달린 침대나 관이나 뭐가 달라요?”
“관은 말이죠” 하고 메리 제인도 지질 않았다. “늘 그들에게 죽음을 연상케 해준단 말예요.”
왠지 화제가 음산한 이야기로 변하자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침묵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동안 맬린즈 할머니가 분명치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참 좋은 사람들이지, 그 수도사들은. 정말 경건한 사람들이야” 하고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포도, 아몬드, 무화과, 사과, 오렌지, 초콜릿, 사탕 등이 빙 한바퀴 식탁에 돌았다. 그리고 줄리아 이모는 손님들에게 포트와인이 나 셰리주를 들라고 권했다. 처음엔 바텔 다아시 씨는 아무것도 들지 않겠다고 사양했으나 옆에 앉은 사람 하나가 옆을 쿡 찌르며 무슨 말을 속삭이자 할 수 없이 잔을 채웠다. 마지막 잔들이 채워져 가고 있을 때 차차로 이야기는 잠잠해졌다. 그 뒤로 침묵이 따르고 술 따르는 소리와 의자를 바로잡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렸다. 모컨 세 사람도 식탁보를 굽어보았다. 누가 한두 번 기침을 하자, 남자 손님 몇이 조용하라는 신호로 가볍게 식탁을 툭툭 쳤다. 조용해졌다. 가브리엘은 의자를 뒤로 북 밀고 일어섰다.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를 격려해주는 뜻에서 즉시로 높아졌다가 문득 그쳤다. 가브리엘은 떨리는 열 손가락으로 식탁보를 짚고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일동에게 미소진 얼굴을 돌렸다. 일제히 얼굴을 쳐들고 자기를 쳐다보는 죽 늘어선 얼굴들과 마주치자, 그는 얼굴을 들어 샹들리에를 쳐다보았다. 피아노가 왈츠를 치고, 치맛자락들이 응접실 문을 스쳐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 사람들이 바깥 부둣가 눈 속에 서서 불이 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왈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도 공기가 맑으리라. 저 멀리로는 공원이 보이고, 나무마다 눈이 무겁게 쌓여 있었다. 웰링튼 기념비는 약 6만 평방미터의 하얀 눈벌판을 넘어 서쪽을 향해, 반짝이는 눈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예년과 같이 오늘 저녁에도 즐거운 과제가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눌변으로서는 이 과제가 너무도 중한 것 같습니다.”
“천만에요!” 하고 브라운 씨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여하튼 오늘밤 제 행위에 대한 정성만을 믿어주시고 제가 오늘 이 모임에 임하여 지금의 소감을 말씀드리는 동안 잠시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온정이 풍성한 지붕 밑에, 이 온정이 풍성한 식탁을 둘러싸고 우리가 함께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댁의 귀하신 부인들의 후대를 받는 사람이 된 것도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그분들의 후대의 희생자가 되기도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여기서 한번 팔을 둥글게 젓고 말을 멈추었다. 모든 사람이 케이트 이모와 줄리아 이모와 메리 제인을 보고 웃거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세 부인은 기뻐서 모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가브리엘은 대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해가 가면 갈수록 제가 더욱 굳게 느끼는 바는 우리나라가 가장 많은 영광을 돌리며 애써 지켜야 할 전통은 이러한 환대 정신이라는 생각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여러 외국에 다녀왔습니다만) 이것은 현대의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에 고유한 전통인 것입니다. 아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기보다는 결점이라고 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손치더라도 제가 생각하기엔 귀중한 결점이고, 우리가 오래도록 길러나가야 할 결점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적어도 여기 한 가지 제가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집 지붕이 이제 말씀드린 선량하신 부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한 ―― 그리고 저는 진정으로 앞으로도 여러 해 그럴 것을 바랍니다만 ―― 진정과 온정이 깃들인 간곡한 아일랜드 사람의 말을 후대하는 그 전통은 아직도 우리 사이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조상이 우리에게 이어준 것이고, 또한 우리도 후손들에게 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는 동의의 속삭임 소리가 식탁을 연해 퍼져갔다. 미스 아이버즈가 여기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무례하게 가버렸다는 생각이 가브리엘의 마음을 화살처럼 뚫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을 갖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에는 새로운 한 세대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원칙에 자극을 받은 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새로운 이념에 대하여 진지하고 열의가 있습니다. 그 열의는 비록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대체로 보아 진정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의적인 그리고 이를테면 사색에 고민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 교육을 받은 아니 정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가 지난날의 유산이었던 자애와 환대와 유머 같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저 위대한 가수들의 이름에 오늘밤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감히 저는 고백하는 바이지만, 제가 느낀 것은 우리들은 보다 쓸쓸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은 과연 성대한 시대였다고 불러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가 영원히 가버렸다면 적어도 이와 같은 모임에서 우리는 자랑과 애정으로 그 시대를 얘기하고, 세상이 쉽사리 잊지 못할 그들, 고인이 된 위대한 사람들의 추억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기로 합시다.”
“조용히 들어봅시다!” 하고 브라운 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하고 음성을 부드러운 억양으로 낮추면서 가브리엘은 말을 이었다. “이와 같은 모임에는 언제나 우리들 가슴속에 떠오르는 보다 더 슬픈 생각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나간 일, 젊었을 때의 생각, 달라진 일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더욱 그리워지는, 이 자리에 안 계신 분들의 얼굴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행로에는 허다한 이러한 슬픈 추억들이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이러한 생각만 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감하게 우리의 일을 해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정당히 요구하는, 살아 있는 의무와 살아 있는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과거에 집착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밤 여기서 저는 우울한 도덕적 교훈을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일상생활의 번잡과 시끄러움에서 벗어나려고 여기에 함께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정다운 우정 정신에 있어서는 친구로서, 또한 어느 면으로 말씀하면, 참된 동지적 정신에 있어서는 동료로서, 그리고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더블린 악단 세 여신의 손님으로 모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 요란한 박수와 웃음소리가 일제히 식탁에서 터져나왔다. 줄리아 이모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하나하나 차례차례로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았으나 시원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글쎄 우릴 세 여신이라고 하지 않아요, 줄리아 고모님” 하고 메리 제인이 일러주었다.
줄리아 이모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서 생긋 웃으면서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는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저녁, 패리스가 옛날에 한 역할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분 사이에 차이를 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은 저에게 외람된 일이며, 또 제 힘이 못 미치는 일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제가 차례차례로 세 분을 보니, 그 친절하신 마음, 그 너무나도 친절하신 마음이 그분을 아는 우리에게는 속담처럼 되어버린 첫째 주인을 택해야 좋을지, 혹은 그분의 동생, 해마다 더 젊어지시는 듯한 천품을 타고나시고, 또 오늘 밤에 부르신 그 노래는 우리 모두의 놀라움과 계시가 되신 그분을 택해야 좋을지, 혹은 마지막으로 그러나 앞의 두 분에게 조금도 못지않게 재원이시고 쾌활하시고 근면하시고 모범적인 조카딸이신 제일 연소하신 주인을 택해야 좋을지, 여러분,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느 분에게 상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브리엘은 이모들을 내려다보고, 줄리아 이모의 얼굴에 떠오른 큰 미소와 케이트 이모의 눈에 떠오른 눈물을 보고서 얼른 말끝을 맺으려고 했다. 그는 잔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좌중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잔을 만지작거릴 때 우렁차게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 세 분을 위하여 축배를 듭시다. 세 분의 건강과 재복과 장수와 행복과 번영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또 세 분이 그 분야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확보하신 영광스러운 지위와 우리 마음 한가운데 차지하고 계시는 존경과 사랑의 자리를 오래도록 간직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손님들은 모두 잔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세 부인을 향하여 브라운 씨의 선창으로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아니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네.
케이트 이모는 남의 눈을 피할 것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으며, 줄리아 이모도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프레디 맬린즈는 푸딩 포크로 장단을 맞추고, 모두 마주서서 노래하며 마치 노래의 회의라도 하는 듯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고 후렴을 우렁차게 힘을 주어 부른 다음, 다시 한번 주인들 쪽으로 돌아서서 노래했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쾌활한 친구들,
아니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네.
이어서 터져나온 환호는 식당 문 밖에 있는 손님들에게까지 퍼져서, 프레디 맬린즈가 포크를 높이 휘두르며 지휘를 하는 가운데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찌르는 듯한 새벽 바람이 손님들이 서 있는 현관으로 불어들어왔으므로 케이트 이모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문 좀 꼭 닫아줘, 맬린즈 할머니 감기드시겠어.”
“브라운 씨가 밖에 나가 계셔요, 케이트 고모님.” 메리 제인이 대꾸했다.
“브라운은 안 가는 데가 없군” 하고 케이트 이모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메리 제인은 그 말투가 우스운 듯 비꼬았다.
“참 그분은 자상한 분이셔.”
“그 사람은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우리 집에 와서 무척 도움이 됐지” 하고 똑같은 말투로 케이트 이모는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기분 좋게 웃고 나서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그 사람더러 어서 좀 들어오라고그래, 메리 제인. 그리고 문 좀 닫아. 설마 브라운이 내 말을 듣지는 않았겠지.”
그때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브라운 씨가 가슴이 터질 듯이 웃으면서 문간에서 들어왔다. 가짜 아스트라칸 커프스와 칼라가 달린 기다란 초록색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타원형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눈에 덮인 강가를 가리켰다. 거기서 누가 날카롭고 길게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디는 더블린 장안의 마차를 죄다 불러낼 셈인가 봐요” 하고 그가 말했다.
가브리엘은 사무실 뒤에 있는 식기실에서 외투 소매를 끼면서 나와 현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레타는 아직 안 내려왔나요?”
“옷은 입고 있던데그래, 가브리엘” 하고 케이트 이모가 대답했다.
“거기서 누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거죠?” 가브리엘이 물었다.
“아무도 없어, 다들 갔어.”
“아니에요, 케이트 고모님.” 메리 제인이었다. “바텔 다아시와 미스 오캘러헌은 아직 안 갔어요.”
“그럼 누가 아직도 피아노 장난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가브리엘의 이 말에 메리 제인은 흘깃 가브리엘과 브라운 씨를 보더니 몸을 떨면서 말했다.
“두 분이 그렇게 든든히 차리고 나선 것을 보니까 나도 추운 것 같아요. 나 같으면 이런 시각에 집에 가려고 나서진 않겠어요.”
“난 이 시각에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거나 그렇지 않으면 쏜살같이 달리는 말에 긴 굴레를 채워서 달리는 것보다 더 통쾌한 일은 없겠어” 하고 브라운 씨가 통쾌하게 말했다.
“옛날에는 우리 집에도 좋은 말과 이륜마차가 있었는데” 하고 줄리아 이모가 서글프게 말했다.
“그 잊지 못할 조니 말이지요” 하고 메리 제인이 깔깔 웃었다.
케이트 이모와 가브리엘도 따라 웃었다.
“근데 그 조니라는 말이 어디가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하고 브라운 씨가 물었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패트리크 모컨 어른은 만년에는 영감님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분이셨는데, 아교를 만드시는 분이셨어” 하고 가브리엘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야, 가브리엘” 하고 케이트 이모가 웃었다. “풀 공장을 가지고 계셨어.”
“좋아요, 아교든 풀이든 간에” 하고 가브리엘도 웃었다. “그분에게 조니라는 이름의 말이 한 마리 있었어요. 그리고 그 조니가 늘 영감님 공장에서 방아를 삥삥 돌리면서 일을 했답니다. 그것까지는 좋았어요. 그러나 이제부터 조니의 슬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영감님은 유지들과 함께 말을 타고 공원에서 열리는 열병식 구경을 가기로 하셨습니다.”
“주여, 아버지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소서.” 케이트 이모가 측은해하는 말투로 말했다.
“아멘” 하고 가브리엘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듯이 영감님은 조니를 마차에 달고 제일 좋은 실크 모자에 제일 좋은 칼라를 달아 입고, 아마 그게, 배크 레인일 거예요. 아무튼 그 근처 어디에 있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저택에서 의젓한 풍채로 나오셨어요.”
가브리엘이 흉내내는 것을 보고 모두가 웃었다. 맬린즈 할머니마저 웃었다.
“아냐, 가브리엘, 배크 레인에 사신 것이 아냐, 정말. 공장만 거기 있었지” 하고 케이트 이모가 시정했다.
“선조 대대의 저택에서 나오셔서,” 하고 가브리엘은 말을 이었다. “조니를 타고 가셨죠. 그리고 윌리엄 왕 동상이 있는 데까지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윌리엄 왕이 탄 말에 반했는지 혹은 공장으로 다시 돌아온 줄로 생각했는지 어쨌든 조니 양반이 동상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지 뭐예요.”
가브리엘은 다른 사람들이 웃는 가운데 덧신을 신고서 현관 안을 빙빙 돌았다.
“빙글빙글 이렇게 막 도는 거예요” 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퍽이나 점잔을 빼는 이 영감님은 몹시 노여우셔서, ‘어서 가요! 이 양반이 왜 이래? 조니! 조니! 알 수 없는 일일세!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가브리엘이 내는 흉내에 와 터져나온 웃음소리가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뚝 그치고 말았다. 메리 제인이 뛰어가서 문을 열어주자 프레디 맬린즈가 들어왔다. 모자를 뒤로 젖혀쓰고, 추워서 어깨를 바싹 오그리고 뛰어온 뒤라서 숨이 차고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에이, 마차를 한 대밖에 못 잡았네” 하고 그는 툴툴거렸다.
“괜찮아요, 강가를 따라가다가 또 한 대 잡으면 되지 뭐” 하고 가브리엘이 대꾸했다.
“그래.” 케이트 이모도 맞장구를 쳤다. “맬린즈 할머닐 바람받이에 서 계시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맬린즈 할머니는 아들과 브라운 씨의 부축을 받고서 현관 층계를 내려온 다음 한참 낑낑 맨 끝에 마차에 올라탔다. 프레디 맬린즈가 어머니 뒤를 따라 마차에 기어올라 오랜 시간 끝에 브라운 씨의 충고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편히 앉게 해드렸다. 드디어 어머니도 편히 앉게 되자 프레디 맬린즈가 브라운 씨에게 타라고 권했다. 한참 옥신각신한 끝에 브라운 씨가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는 담요를 무릎에 덮은 다음 몸을 이쪽으로 숙이고서 목적지를 물었다. 프레디 맬린즈와 브라운 씨가 제각기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서 마부에게 서로 다른 방향을 지시했기 때문에 옥신각신은 점점 더 커졌다. 문제는 가다가 어디서 브라운 씨를 내려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케이트 이모, 줄리아 이모, 메리 제인도 문간에 서서 서로 어긋나는 방향이며, 상치되는 지시와 웃음 사태를 보내면서 말참견을 했다. 프레디 맬린즈는 웃느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마차 문으로 연방 머리를 내밀었다 들여보냈다 하며 모자를 떨어뜨릴 뻔하면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어머니한테 보고했다. 마침내 브라운 씨가 사람들의 웃음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마부에게 외쳤다.
“트리니티대학을 아시오?”
“예.”
“그럼 좋아요. 트리니티대학 정문 앞까지 바싹 갑시다!” 하고 브라운 씨가 일렀다. “그러면 거기서 어디로 가라고 이를 테니, 이젠 아시겠소?”
“예.”
“트리니티 대학을 향해 휭하니 갑시다.”
“예, 그럽죠.”
대답과 동시에 채찍이 내려졌다. 마차는 웃음소리와 작별 인사가 일제히 일어나는 가운데서 강가를 따라 덜걱덜걱대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간에까지 나오지 않고, 현관의 어둠 속에 서서 층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부인 하나가 첫 층계 꼭대기 가까이에, 역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스커트의 적갈색과 앵두색 줄이 어둠 속에서 까만색과 흰색으로 보였다. 아내였다. 난간에 기대 서서 무슨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내가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에 놀라, 자신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현관 앞 층계에서 웃으며 떠드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피아노에서 나는 토막토막의 화음과 어떤 남자의 노랫소리만이 약간 들렸다.
그는 현관의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그 노래의 곡조를 들어보려고 애쓰면서 아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의 자태는 흡사 무엇의 상징인 양 우아하고 신비스러웠다. 계단의 어둠 속에 서서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자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스스로 물어보았다. 내가 화가라면 아내의 저런 모습을 그리고 싶다. 어둠을 배경으로 파란 펠트 모자로 그녀의 청동빛 머리카락을 뚜렷이 드러내고, 또 스커트의 검은 줄과 흰 줄을 선명히 돋아나게 그리리라. 그는 자신이 화가라면 그 그림을 〈먼 음악〉이라고 이름짓겠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케이트 이모, 줄리아 이모, 메리 제인이 아직도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글쎄, 프레딘 정말 지독하지요?” 메리 제인이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가브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아내가 서 있는 층계를 가리켰다. 현관문이 닫혔기 때문에 노래하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더 똑똑히 들렸다. 가브리엘은 조용히 하라고 한 손을 쳐들었다. 그 노래는 고대 아일랜드의 가요 같았고, 노래하는 사람은 가사에도 목소리에도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노래가 멀고 또 노래하는 사람의 목이 쉰 것 때문에 곡조의 오르내림도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가사는 서글픈 것이었다.
아, 비는 내 머릿단에 내리고
살은 이슬에 젖었는데,
내 아기는 차디차게 누워……
“아,” 하고 메리 제인이 음성을 높였다. “바텔 다아시 씨가 노래하고 계시군요. 밤새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분이. 가시기 전에 꼭 한 곡 불러달라고 해야지.”
“참, 그래라.” 케이트 이모도 맞장구를 쳤다.
메리 제인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서 층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에 다다르기도 전에 노랫소리는 뚝 그치고 피아노도 갑자기 닫히고 말았다.
“아아, 아까워라!” 정말 서운한 모양이다. “그분이 지금 내려오셔, 그레타?”
가브리엘은 아내가 그렇다고 대답하고서 자기들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내의 몇 발자국 뒤에 바텔 다아시 씨와 미스 오캘러헌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 다아시 선생님” 하고 메리 제인이 외쳤다. “선생님 노래를 듣고 다들 황홀해하고 있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뚝 그쳐버릴 수 있어요?”
“내가 온 저녁 졸랐지 뭐예요.” 오캘러헌이 대꾸했다. “콘로이 부인께서도요. 그랬더니 감기가 지독히 걸려서 노래를 할 수 없다시지 뭡니까.”
“아, 다아시,” 케이트 이모도 한마디 했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내가 까마귀처럼 목이 쉰 걸 모르십니까?” 하고 다아시 씨도 지질 않았다.
그는 식기실로 허둥지둥 들어가서 외투를 입었다. 그의 무례한 말에 기가 질려 다들 말문이 막혔다. 케이트 이모가 이마를 찌푸리고 그런 이야기는 모두들 그만들 두라고 눈짓을 했다. 다아시 씨는 목을 목도리로 잘 싸 감으면서 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날씨 탓이지.” 잠시 가만히 있던 줄리아 이모도 한마디 했다.
“그렇지, 감기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케이트 이모가 그 말을 얼른 받았다. “모두가 감기에 걸리지.”
“30년 이래의 큰 눈이라던데요, 오늘 조간에 나와 있는데 아일랜드 전국에 눈이 내렸대요.” 메리 제인이 말했다.
“난 설경이 좋아.” 서글픈 줄리아 이모의 말에 미스 오캘러헌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래요. 눈이 내리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다아시는 눈을 싫어하는 모양이지” 하며 케이트 이모가 생글 웃었다.
그때 다아시 씨가 단단히 목을 감고 단추도 있는 대로 다 채우고 나서 식기실에서 나오더니 미안하다는 듯이 감기가 든 내력을 털어 놓았다. 그 말에 모든 사람이 저마다 그에게 충고를 하며, 그거 참 안됐다고 하며, 밤공기에 목을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가브리엘은 이 대화에 끼지 않고 있는 아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내는 먼지 낀 뿌연 부채꼴 장식창 바로 밑에 서 있었다. 며칠 전에 난롯불에 쪼이며 말리는 것을 본 아내의 머리가 이제 가스등의 불꽃으로 진한 청동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내는 그때와 똑같은 자세로 서서 주위에서 오고 가는 말을 의식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아내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가브리엘이 보니 두 볼은 불그레하고 눈이 빛나고 있었다. 기쁨의 물결이 갑자기 가브리엘의 가슴속에서 파동을 쳤다.
“다아시 선생님, 아까 부르시던 그 노래의 제목이 뭐죠?” 하고 그녀가 물었다.
“〈오그림의 처녀〉[민요의 이름]라고 합니다.” 다아시 씨가 대답했다. “가사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왜요? 그 노래를 잘 아시나요?”
“〈오그림의 처녀〉” 그녀는 되뇌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참 좋은 곡인데” 하고 메리 제인도 감탄했다. “오늘밤엔 목소리가 잘 나지 않아 섭섭하군요.”
“자, 메리 제인,” 케이트 이모도 끼어들었다. “다아시 씨를 괴롭히지 말아, 나라면 괴롭히지 않았을 게다.”
모두가 떠날 준비가 된 것을 보고서 그녀는 그들을 문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작별 인사가 오고 갔다.
“자, 안녕히 계세요, 케이트 이모님. 잘 놀고 갑니다.”
“잘 가라, 가브리엘. 잘 가, 그레타!”
“안녕히 계세요, 케이트 이모님,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줄리아 이모님.”
“아, 잘 가, 그레타, 내가 몰랐군.”
“잘 가, 다아시. 잘 가, 미스 오캘러헌.”
“안녕히 계세요, 모컨 아주머니.”
“잘들 가, 그럼.”
“모두 잘들 가, 조심들 해.”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계세요.”
새벽은 아직도 어두웠다. 누르스름한 빛이 집들과 강 위를 감돌고, 하늘이 내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땅은 질고, 지붕과 강가의 흉벽(胸壁)과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둘러친 철책 위에 눈이 기다랗게 혹은 둥글게 남아 있었다. 가로등은 아직도 거무스름한 하늘에 빨갛게 켜 있고, 강 저쪽으로는 무거운 하늘을 등지고 법원이 위협하듯이 우뚝 서 있었다.
아내는 바텔 다아시 씨와 나란히 그의 앞에 서서 걷고 있었다. 누런 보자기에 싼 구두를 한쪽 팔 아래에 끼고, 두 손으로는 진창에 치맛자락이 닿을까 봐 쳐들고 걸어갔다. 아내에게서 아까와 같은 우아한 태도는 이미 볼 수 없었지만, 가브리엘의 눈은 아직도 기쁨으로 번득였다. 피가 혈관 속을 약동하며 흐르고,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자랑스럽고 즐겁고, 정답고, 세차게 뒤섞이며 지나갔다.
아내는 자기 앞을 어찌나 사뿐히, 그리고 어찌나 다소곳이 걷고 있던지, 그 뒤를 소리없이 뛰어가서, 아내의 어깨를 덥석 껴안고서, 그 귀에다 대고 무슨 어리석고 다정스러운 말을 속삭여주고 싶었다.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기에 무엇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싶고, 또 단 둘이만 있고 싶었다. 자기들만이 아는 두 사람의 생활의 여러 순간이 별처럼 그의 추억 속에 흩어졌다. 엷은 자줏빛 봉투 하나가 아침에 커피를 마실 때 쓰는 컵 옆에 놓여 있고, 그것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새들이 담쟁이 속에서 지저귀고, 거미줄 같은 커튼의 그림자가 마루 위에서 아롱진다. 행복에 넘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사람들이 들끓는 정거장 플랫폼에 서서 아내의 장갑 낀 따뜻한 손바닥에다 차표를 쥐어주는 광경, 추운데 아내와 함께 서서 어떤 사나이가 소리를 내며 활활 타는 아궁이에서 병을 만들고 있는 것을 창살을 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던 일, 그날은 무척 추웠다. 찬 공기 속에서 향그러운 아내의 얼굴이 자기 얼굴 바로 옆에 있었다. 갑자기 그는 아궁이 앞에서 일하는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불이 뜨거운가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아궁이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들었다 해도 무례하게 대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아직도 더 다정스러운 기쁨의 파동이 그의 심장에서 뿜어나와 뜨거운 홍수처럼 그의 동맥 속을 굽이쳐 달렸다. 다정스러운 별빛처럼 아무도 모르는, 또 아무도 모를 두 사람만의 생활의 순간순간이 머리에 떠올라 그의 기억을 빛내었다. 이러한 순간을 아내에게도 상기시켜, 함께 보내온 무미건조한 세월을 잊어버리고, 다만 황홀한 순간만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지나간 세월은 자기의 영혼이나 아내의 영혼을 고갈시킨 것 같지는 않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그의 집필도, 아내의 살림 걱정도, 그들 영혼의 모든 부드러운 불을 꺼뜨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 그가 아내에게 써 보낸 어떤 편지에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이런 말들이 나에게 이렇게도 무미건조하고 차게 생각되는 것은 웬일일까요? 당신을 부르기에 알맞은 다정한 말이 없기 때문일까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처럼 여러 해 전에 그가 쓴 이러한 말들은 과거로부터 그에게로 되살아왔다. 그는 아내와 단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나와 아내만 이 호텔방에 있게 되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이렇게 불러주자.
“그레타!”
아마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옷을 벗고 있는 중일 테니까. 그러다가 내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정신을 차려 나에게로 돌아서서 나를 볼 테지…….
와인태번 가 모퉁이에서 그들은 마차 하나를 만났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 때문에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고마웠다. 아내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친 것 같아 보였다. 다른 두 사람은 어떤 건물이나 거리를 가리키면서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말은 음산한 새벽 하늘 아래를 덜컹거리는 마차를 끌고 힘없이 달렸다. 가브리엘은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려고 아내와 달리는 마차에 다시금 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차가 오코널 다리를 건널 때 미스 오캘러헌이 입을 열었다.
“오코널 다릴 건널 땐 반드시 흰 말이 보인다던데요.”
“이번엔 흰 사람이 보이는군요” 하고 가브리엘이 말을 받았다.
“어디요?” 바텔 다아시 씨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그 머리 위에 눈이 군데군데 덮인 동상을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 다정스럽게 그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흔들어 쾌활하게 외쳤다.
“안녕하시오, 댄!”
마차가 호텔 앞에 닿자 가브리엘이 껑충 뛰어내려, 바텔 다아시 씨가 굳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마부에게 차삯을 치르고, 또 1실링을 더 주었다. 마부는 절을 하며 말했다.
“새해에 다복하십시오.”
“댁에도” 하고 가브리엘도 공손히 인사말을 보냈다.
아내는 잠시 그의 팔에 의지하여 마차에서 내려 보도 연석(緣石) 위에 서서 마차 안에 남은 사람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아내는 몇 시간 전에 그와 춤을 출 때처럼 가볍게,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때 그는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었다. 이 사람이 내 것이라는 것이 기뻤고, 그 맵시가 우아하고 몸가짐이 아내다워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다시금 수많은 추억의 불이 켜진 다음, 음악적이고 야릇한 향그러운 그녀의 감촉을 이제 비로소 느끼니 강한 욕정이 심한 고통처럼 그의 몸을 지나갔다. 아내가 가만히 있는 틈을 타서 그는 잠자코 아내 팔을 잡아다가 자기 허리에 꼭 대었다. 그리고 둘이서 호텔 문에 서 있노라니까 생활과 의무로부터 벗어나고, 가정과 친구로부터도 벗어나고, 거칠고도 찬란한 마음으로 새로운 모험을 향하여 함께 도망치는 것만 같았다.
한 노인이 현관에 있는 커다란 커버를 씌운 의자에 앉아서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자 사무실로 들어가서 촛불을 켜들고 나와 그들 앞에 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말없이 두꺼운 양탄자를 깐 계단을 사뿐사뿐 밟으며 노인 뒤를 따랐다. 아내는 노인 뒤를 따라 머리를 숙이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무거운 짐이라도 진 듯이 가냘픈 허리를 굽히고……. 스커트는 몸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아내의 허리를 두 팔로 덥석 안고 아내를 꼭 껴안았으면 싶었다. 팔이 아내를 붙들고 싶은 욕망에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을 손바닥에 꼭 박아서 몸의 세찬 욕정을 억제했다. 노인은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촛농이 녹아내리는 초를 바로 세웠다. 두 사람도 노인의 아래 층계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요 속에서 가브리엘은 녹은 초가 쟁반 위에 떨어지는 소리와, 자기 심장이 늑골에 부딪치는 고동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문지기는 앞에 서서 복도를 걸어가더니 어떤 문 하나를 열었다. 그러고 나서 간들거리는 촛불을 화장대 위에 세워놓고서 아침 몇시에 깨우러 올까요, 하고 물었다.
“여덟시” 하고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문지기는 전등 스위치를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중얼 변명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불은 필요 없습니다. 거리에서 들어오는 빛이면 넉넉합니다. 그리고……” 하며 촛불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저 보기 좋은 물건도 가져가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문지기는 또다시 그가 가지고 온 촛불을 집어들었으나, 이렇게 어이없는 말에 놀라서인지 동작이 느렸다. 그러더니 안녕히 주무시라고 중얼거리며 나가버렸다. 가브리엘은 곧 문을 잠가버렸다.
거리의 가로등에서 들어오는 창백한 빛이 창문으로부터 방문에 이르기까지 기다란 한 줄기 빛이 되어 가로누워 있었다. 가브리엘은 외투와 모자를 장의자 위에 던진 다음, 방을 가로질러 창 앞으로 걸어갔다. 격정을 좀 가라앉히기 위하여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 빛을 등지고 옷장에 기대 섰다. 아내는 벌써 모자와 외투를 벗고, 앞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허리의 단추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가브리엘은 잠시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레타!”
아내는 천천히 거울로부터 이쪽으로 돌아서 기다란 광선을 따라 그에게로 걸어왔다. 아내의 얼굴이 너무나 심각하고 지쳐 보였으므로 가브리엘의 입에서는 하려던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말할 때가 아니었다.
“당신 고단해 보이더군.”
“좀 피곤해요.”
“어디가 아프거나 기운이 없는 게 아니오?”
“아뇨, 그저 고단할 뿐이에요.”
그녀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가브리엘은 또다시 기다리다가 이렇게 수줍어하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그레타!”
“왜 그러세요?”
“그 맬린즈란 녀석, 당신도 알지?” 하고 그는 다짜고짜로 물었다.
“네, 그이가 어쨌어요?”
“그래도 사람은 좋은 녀석이야” 하고 가브리엘은 꾸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글쎄 내가 꾸어준 돈 1파운드를 갚지 않았겠소. 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정말. 그 브라운이라는 사람과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 탈이거든. 실상 나쁜 사람은 아냐.”
이제 그는 짜증이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아내는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랐다. 아내도 무슨 일로 짜증을 부리는 것일까? 아내가 마음이 내켜서 나에게로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현재대로의 그녀를 불쑥 껴안는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리라. 아니, 우선 아내의 눈에 얼마간의 정열이 떠오른 것을 보아야 한다. 그는 아내의 알 수 없는 기분을 파악하고 싶어 애가 달았다.
“언제 돈을 꾸어주셨는데요?” 하고 잠시 후에 아내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그 주정뱅이 맬린즈와 그 꾸어준 돈에 관하여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내에게 진정으로 호소하고, 아내의 육체를 바싹 껴안고, 정복해 버리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나왔다.
“아, 크리스마스 때요, 헨리 가에다 그 친구가 조그만 크리스마스 카드 가게를 냈을 때야.”
격정과 욕정이 복받쳐서 그는 아내가 창가에서 걸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내는 그의 앞에 잠시 서서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끝으로 서서 그의 어깨에 두 손을 가볍게 얹고서 키스했다.
“당신은 참 너그러운 분이세요, 가브리엘.” 아내는 말했다.
아내의 갑작스런 키스와 그 기이한 말에 기뻐서 몸을 떨면서 가브리엘은 아내의 머리에 두 손을 얹어 손가락이 머리에 닿을락말락 뒤로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머리를 잘 감아서 보드랍고 윤이 났다. 그의 가슴은 행복감에 넘칠 지경이었다. 그가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바로 그때 그녀가 자진해서 그에게로 온 것이 아닌가. 아내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느낀 격렬한 욕정을 아내도 느끼고서 몸을 내맡기겠다는 기분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이렇게도 쉽사리 오고 보니 왜 자신이 그렇게까지 쑥스러워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맞잡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재빨리 한 팔로 아내의 몸을 안아 당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레타, 여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아내는 대답도 안 하고 그렇다고 그가 끄는 대로 그의 팔에 아주 안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내게 얘기 좀 해봐요, 응, 그레타. 내가 무슨 일인지 알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아내는 당장은 대답을 못하더니 잠시 후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그 노래 〈오그림의 처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내는 그를 뿌리치고 나서 침대로 달려가 침대 난간에다 두 팔을 걸치고서 그 속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가브리엘은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서 있다가 아내 뒤를 좇았다. 큰 거울 앞을 지날 때에 그곳에 비친 자기의 전신과, 넓직하고 반반한 예복을 입은 앞가슴과, 거울 속에서 볼 때면 언제나 자신도 이상스러운 얼굴 표정, 그리고 번쩍이는 금테 안경이 보였다. 아내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발을 멈추고 서서 그는 물었다.
“그 노래가 어떻게 됐다는 거요? 노래가 어때서 우는 거지?”
아내는 팔에 묻었던 머리를 들어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다정스러운 어조가 그의 음성에 섞여 있었다.
“왜 그래, 그레타?” 하고 그는 물었다.
“옛날에 그 노래를 부르던 사람 생각이 나서요.”
“옛날의 그 사람이란 누군데?” 가브리엘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내가 할머니하고 골웨이에서 살던 시절에 알던 사람이에요.”
가브리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딘 분노가 그의 뇌리에 다시 뭉치기 시작하고, 가라앉았던 정욕의 불꽃이 다시금 그의 혈맥 안에서 펄펄 끓어올랐다.
“당신이 사랑하던 어떤 사람인가?” 그는 비꼬는 말투였다.
“내가 알던 소년이었어요, 마이클 퓨리라는. 그애가 그 〈오그림의 처녀〉라는 노래를 늘 불렀어요. 아주 몸이 약한 소년이었어요.”
가브리엘은 가만히 있었다. 이 몸이 허약했다는 소년에게 자기가 관심을 가졌다고 아내가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해요.” 잠시 후에 아내는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할 수 없는 크고도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눈엔 뭐라고 할 수 없는 표정이 있었어요 ―― 어떤 표정이!”
“아, 그렇다면 당신은 그애를 사랑하고 있었군?”
“같이 늘 소풍을 다녔어요, 골웨이에 있을 때.”
어떤 생각이 가브리엘의 가슴속을 스쳐갔다.
“그래서 그 아이버즈란 여자하고 골웨이에 가고 싶어 한 거로군?” 차갑게 물었다. 이 말에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하러요?”
아내의 시선에 부딪치자 가브리엘은 당황했다. 그는 어깨를 움츠려 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안담? 아마, 그 사람을 보고 싶어서겠지.”
아내는 그에게서 시선을 옮겨 광선의 줄기를 따라 유리창 쪽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아내는 마침내 대답했다. “겨우 열일곱 되던 해에 죽어버렸어요. 그렇게 젊어서 죽다니 끔찍한 일이 아니에요?”
“뭘 하는 아이였는데?” 가브리엘은 여전히 빈정거리며 물었다.
“가스 공장에 다녔어요.” 아내가 대답했다.
가브리엘은 비꼬아준 말이 실패로 돌아가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스 공장의 소년공이라는 이 인물을 불러낸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가슴에 우리 두 사람만의 생활에 관한 추억이 가득 차고, 사랑과 기쁨과 정욕에 가득 차 있는 때 아내는 마음속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자기라는 것이 새삼스레 의식되어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이모들의 심부름꾼 아이 노릇이나 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 속된 사람들에게 웅변을 토하며, 광대 같은 욕정을 이상화하는 신경질적이며 악의가 없는 감상적인 사람, 거울 속에서 흘깃 보았던 불쌍하고도 얼빠진 꼴이 눈에 떠올랐다. 이마에 타오르는 치욕의 빛을 아내가 볼까 싶어 그는 본능적으로 더욱 광선 쪽으로 등을 돌렸다.
여전히 냉정하게 묻는 어조를 갖추려고 애썼으나 그의 말에는 말소리가 한풀 꺾이고 힘이 없었다.
“당신은 그 마이클 퓨리를 사랑하고 있었나 보지, 그레타.”
“그때는 그애를 무척 좋아했어요.”
아내의 음성은 감정을 한꺼풀 덮고 서글펐다. 가브리엘은 자기가 의도했던 곳으로 아내를 이끌려는 자기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나를 느끼게 되자 아내의 한쪽 손을 쓰다듬으면서 자기도 역시 서글피 말했다.
“그런데 왜 그애가 그렇게 일찍 죽었지, 그레타? 폐병이었나?”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요.”
아내의 이 대답에 가브리엘은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마치 자기가 승리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그 순간에, 어떤 앙심을 먹은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그 몽롱한 세계에서 싸울 힘을 모아가지고 자기에게로 덤벼들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힘으로 그 생각을 뿌리치고 그냥 자꾸만 아내의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다시금 아내에게 캐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아내가 술술 이야기해 주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내의 손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그 손은 쓰다듬어주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봄날 아침 처음으로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를 어루만졌듯이 아내의 손을 자꾸만 어루만져주었다.
“그땐 겨울이었어요.” 아내는 말을 이었다. “내가 할머니네 집을 떠나서 이곳 수도원으로 오던 해의 초겨울이에요. 그때 그 아이는 골웨이에 있는 그의 하숙에서 앓고 있어 외출이 금지되어 있어서 우터라드에 있는 식구들에게 편지로 알려드렸지요. 병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문이었어요. 난 무슨 병인지 잘 몰랐지 뭐예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숨을 쉬더니 아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엾게도 나를 무척 좋아하고, 퍽이나 얌전한 소년이었는데. 시골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늘 함께 나가서 걸어다니곤 했어요. 건강만 아니면 노래 공부를 할 작정이었는데. 아주 훌륭한 음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엾은 마이클 퓨리는.”
“그래서?” 가브리엘이 물었다.
“내가 골웨이를 떠나서 수도원으로 올 때가 되니까 그 아이는 병이 더 심해져서 면회도 금지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편지를 보냈어요. 나는 더블린으로 간다는 것, 여름이면 돌아오리라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는 병이 낫기를 바란다는 사연의 편지를요.”
아내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날 밤 넌즈 아일랜드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짐을 싸고 있노라니까 누가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소리가 났어요. 유리창이 비에 젖어서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대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서 뒷마당으로 나갔더니, 아 글쎄 그애가 덜덜 떨면서 마당 한구석에 있지 않겠어요, 가엾게도.”
“그래 돌아가란 말도 안 했나, 당신은?”
“곧 집으로 돌아가라고 애원하며, 그러다간 비를 맞고 죽는다고 했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만,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때의 그애 눈이 지금도 보이는 것 같아요! 그애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담 한 끝에 서 있었어요.”
“그래 그앤 집에 갔소?”
“네, 가고말고요. 그리고 내가 수도원으로 가고 나서 일주일도 채 못 되어 그애는 죽어서 고향인 우터라드에 묻혔어요. 아, 그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 생각을 하면!”
울음에 목메고 감정에 억눌려 아내는 말을 그치고 침대 위에 털석 엎드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가브리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내의 손을 잠시 더 잡고 있다가 남의 설움에 자기도 한몫 끼는 것 같아 손을 가만히 놓고 창가로 소리없이 걸어갔다.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가브리엘은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서 잠시 동안 화난 기색도 없이 헝클어진 아내의 머리와 반쯤 열린 입을 들여다보며 깊이 들이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아내의 인생에는 그런 로맨스가 있었구나……. 한 사람이 아내 때문에 죽었구나. 그가, 그녀의 남편인 그가, 아내의 인생에서 얼마나 미약한 역할을 했나를 생각해도 이제는 그에게 거의 고통이 되지는 않았다. 자기들이 부부답게 같이 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잠을 자고 있는 아내를 그는 지켜보았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의 눈이 오랫동안 아내의 얼굴과 머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즉 처음 피어나는 아리따운 처녀 시절의 아내의 모습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았을 때 아내에 대하여 이상스럽고도 다정한 가엾은 생각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이 이미 아름답지 않다고는 마음속으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그것은 마이클 퓨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왔을 때의 그 얼굴이 이미 아님을 알았다.
아마 아내는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의 눈은 아내가 옷 몇 가지를 벗어 걸친 의자 쪽으로 움직였다. 속치마 끈 하나가 마룻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장화 한 짝은 그 부드러운 상부만이 꺾여 축 늘어진 채 똑바로 서 있고, 다른 짝은 가로누워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복받쳐오르던 자기의 격정이 이제 생각해보니 이상하기만 했다.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모댁에서의 만찬에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연설에서, 포도주와 춤에서,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에 하던 농담에서, 강을 따라 눈 속을 걷던 기쁨에서 온 것이리라. 불쌍한 줄리아 이모! 그녀도 또한 패트리크 모컨과 그의 말의 그림자처럼 머지않아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버리고 말리라. 아까 줄리아 이모가 〈신부로 단장하고〉를 부를 때의 이모의 얼굴에 순간 수척한 표정이 보였었다. 아마 머지않아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실크 모자를 무릎 위에다 놓고 똑같은 응접실에 앉아 있으리라. 블라인드가 내려 있고, 케이트 이모가 그 곁에 앉아서 울며 불며 코를 풀어가면서 줄리아 이모가 세상을 떠난 경위를 이야기하리라. 이모를 위로할 말을 마음속으로 찾아보지만 서투르고 신통치 않은 말밖에 찾아낼 수가 없으리라. 그래, 그렇다. 이러한 일이 머지않아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어깨를 으스스하게 했다. 조심조심 이불 밑으로 몸을 펴고 아내 곁에 누웠다.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은 그림자가 되어 사라진다. 어떤 정열이 한창 불타는 영광 속에서 저 세상으로 대담하게 가버리는 것이 차라리 늙고 시들어 쓸쓸히 사라지기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는 곁에 누워 있는 아내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때의 애인의 눈의 그 환상을 얼마나 오랜 세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관용의 눈물이 가브리엘의 눈에 가득 어리었다. 그는 아직껏 어떠한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신 이런 감정을 가져본 일이 없었으나, 그는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에 틀림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더욱 글썽거리며,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른 모습들도 그 곁에 보였다. 그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사는 영역으로 벌써 다가갔다. 걷잡을 수 없이 어른거리는 사자(死者)들의 존재를 그는 의식하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유리창을 서너 너더댓 번 가볍게 치는 소리에 그는 창 쪽을 돌아다보았다. 눈이 또다시 내리고 있었다. 졸린 눈으로 그는 은빛과 검은빛의 눈송이가 가로등불을 등지고 비스듬히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도 서쪽으로 나그네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눈은 검은 중부 평야의 구석구석과 나무 없는 언덕에 내리고, 또 앨린의 늪[아일랜드 동남부의 늪. 더블린에서 40킬로미터] 위에도 소리없이 내리고, 또 좀더 멀리 서쪽편, 샤논 강[아일랜드에서 제일 긴 강]의 검고도 거친 물결 위로도 소리없이 내리고 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쓸쓸한 묘지의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다. 비뚤어진 십자가와 묘석들 위에도, 조그만 대문의 뾰족한 문설주 위에도, 마른 쑥덩굴 위에도 눈이 바람에 날려와 두껍게 쌓였다. 온 세상에 사뿐히 내리는 눈 소리, 그와 아내에게 내리는 죽음처럼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사뿐히 내리는 눈 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영혼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