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가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니 마을 놀이터에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대부분 3학년 아이들이었는데, 킥보드로 시합을 벌이다가 무슨 문제로 다투는 모양이었다.
“야, 우리 편이 이겼어. 너희 편이 시원이를 밀쳤잖아!”
“일부러 그런 게 아냐! 돌에 걸려서 넘어진 거라구! 그게 왜 반칙이냐?”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도 반칙은 반칙이지. 축구시합에서도 일부러 상대방을 걸지 않아도 넘어지게 하면 호루라기를 불잖아.”
아이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두 편으로 나누어 달리기 시합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두 아이가 부딪치게 되자 잘잘못을 따지는 것 같았다.
성재는 녀석들이 갖고 있는 킥보드를 바라보았다. 빨강과 파랑, 노랑, 연두, 보라의 킥보드들은 화단에 만발한 꽃보다 화사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던 아이들은 무승부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애들은 다시 두 편으로 나누어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더니 일정한 위치에 두 아이를 나란히 세웠다. 곧이어 누군가가 “출발!”이라고 외치자 두 아이가 힘차게 달려 나갔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재는 시선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미끄럼틀 아래에 성호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의 표정에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재를 보지 못했는지 시선은 줄곧 아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성재는 그만 자리를 뜨려다가 잠시 성호를 지켜보았다. 3학년인 녀석은 또래의 아이들보다도 덩치가 퍽 작았다. 머리통도 작고 키도 자그마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1학년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성재가 성호를 지켜보는 동안, 달리기 시합을 마친 아이들은 놀이터에 모였다. 녀석들은 킥보드를 그냥 세워 두거나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바닥에 내팽개쳐 둔 아이도 있었다. 그 애들 앞에서 머뭇머뭇하던 성호는 같은 반인 영준이에게 킥보드를 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화단 앞까지만 갔다 올게.”
영준이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한 아이가 눈살을 찌푸린 채 성호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툭하면 남의 킥보드를 타려고 해. 빌려주지 마.”
성호가 어깨를 움츠리자 다른 아이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성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한 번 타게 해 줘. 네가 싫으면 내 것 빌려줄게.”
“아냐. 내가 빌려줄게.” 영준이는 성호에게 킥보드를 내주며 다짐을 받았다. “딱 한 번만이다.”
성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환해진 얼굴로 킥보드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녀석은 곧바로 화단을 향해 정말 총알보다도 빠르게 달려갔다. 작은 몸집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성재가 저녁 밥상을 차리는데 성호가 들어왔다. 녀석은 성재를 쳐다볼 생각도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성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녀석이 부끄러워할까 봐 놀이터에서 못 본 척하고 먼저 들어왔는데 그 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어쩌면 킥보드를 타던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그 애들 중에는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태민이란 녀석도 끼어 있었으니까.
5분쯤 지나 성호는 잠옷 차림으로 나오더니 식탁 앞에 털썩 앉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시무룩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왜 그래? 밖에서 무슨 일 있었냐?”
성재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으나 성호는 대답하기 싫은지 슬그머니 고개를 수그렸다.
“혹시 태민이랑 싸웠냐?”
그 말에 고개를 쳐든 성호는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아냐. 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성재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던 김치찌개 냄비를 조심조심 식탁 위로 옮겼다. 뚜껑을 열고 나서 숟가락을 집어 들며 성호에게 어서 먹으라고 했다. 성호는 찬밥을 떠서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성재를 건너다보았다.
“오늘 밤, 엄마한테 킥보드 사달라고 해야겠어. 우리 동네에서 킥보드 없는 애는 나밖에 없단 말이야.”
성재는 찌개 국물을 떠서 밥 위에 붓고는 숟가락으로 비볐다.
“엄마가 일부러 안 사주는 게 아니잖아. 비싸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성호는 양 볼이 튀어나오도록 밥을 떠 넣고 꾸역꾸역 씹더니 꿀꺽 삼켰다.
“그래도 딴 애들은 다 갖고 있잖아. 걔네들 집도 모두 부자는 아니란 말이야. 영준이는 할아버지가 빈병을 팔아서 사줬다고 하더라구.”
“그래도 영준이네는 우리 집보다 부자야. 걔네는 엄마 아빠가 모두 직장에 다니니까.”
성호는 다시 한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입안에 넣고는 몇 번 씹지도 않고 삼켜 버렸다.
성재는 녀석이 체하지나 않을까 싶어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그러자 성호는 숟가락을 식탁 위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형은 엄마도 아니면서 맨날 잔소리야!”
“뭐라구?”
순간 성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호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덩치도 작고 몸도 약한 녀석이 안쓰럽게 여겨져서였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갖고 있는 킥보드가 성호에게만 없다고 생각하니 녀석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녀석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여간 밉살스럽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성재는 제 방으로 들어가 숙제를 했다.
그동안 성호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재미난 오락프로라도 보는지 이따금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재는 녀석에게 숙제를 하고 가방을 챙기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곧 엄마가 귀가할 시간인데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엄마에게 킥보드 사달라는 말은 꺼내지 말라고 다짐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재가 거실로 나가는데 딸칵, 현관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들어왔다.
성재는 성호에게 킥보드에 관해 아무 소리도 말라고 재빨리 주의를 주고는 엄마를 향해 돌아섰다. 엄마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피곤해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반찬가게에서 팔다가 남은 거야. 어차피 내일이면 못 파니까 사장님이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저녁은 먹었니?”
“네.”
“먹을 게 별로 없었을 텐데?”
“감자조림하고 어묵볶음하고 김치찌개 데워서 먹었어요.”
성재가 종이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어 냉장고에 넣는 사이 성호가 재빨리 엄마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형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 나서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킥보드를 입에 올렸다.
“나도 하나 사주면 안 돼요? 아이들은 다 갖고 있단 말이에요. 나만 없으니까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구.”
엄마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녀석이 다시 한 번 조르자 마지못한 듯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엄마의 말에 성호가 확답을 받으려는 순간, 성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형의 말이 말 같지 않아! 아까 킥보드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지!”
성호는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성재를 쏘아보았다.
“형이 아빠라도 돼? 난 엄마한테 얘기하는 거란 말이야! 형은 상관하지 마!”
“아니, 이 자식이.”
성재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 기색을 보이자 엄마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형제들 간에 이게 무슨 짓이니? 서로 감싸 주지는 못하고.”
엄마는 무릎을 굽혀 성호를 한 차례 안아 주고는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곧이어 성재를 향해 돌아서더니 성호가 아직 어려서 부리는 투정인데 지나쳤다고 꾸짖었다.
성재는 엄마가 무조건 성호를 편드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요즘 들어 엄마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 더 이상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엄마가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성재는 낡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가 성호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면서도 언제 한 번 따끔한 맛을 보여 주리라 다짐했다.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축구 시합을 마친 성재는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이터 가까이 가다 보니 정글짐 앞에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애들은 누군가를 빙 둘러싼 채 뭐라고 떠들기도 하고 감탄 어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애들 사이에는 성호도 끼어서 안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진 성재는 놀이터로 다가갔다. 이어서 아이들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망가진 킥보드를 고치는 중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크고 머리통도 굵어 보이는 그 애는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앞바퀴를 만지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성재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서 무릎을 굽힌 채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약간 당황했다.
뜻밖에도 그 애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6학년 아이였는데, 싸움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얼마나 몸이 날렵하고 주먹이 센지 웬만한 아이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애가 수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아이들의 얼굴에는 존경의 기색마저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애는 솜씨 좋게 바퀴를 본체에 끼워 넣고 나서 바닥에 세운 채 앞뒤로 움직여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숙련된 기술자 같았다. 킥보드가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어 보이자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털었다.
“이 킥보드 누구 거지?”
그 애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묻자 영준이가 앞으로 나섰다.
“내 건데요.”
“한 번 타 봐. 말끔하게 고쳐졌을 거야.”
영준이는 비딱하게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쓴 다음 킥보드에 왼발을 올려놓았다. 곧이어 오른발로 힘껏 땅을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녀석은 마치 개운천의 피라미처럼 날쌔게 달려갔다가 되돌아왔다.
“어때? 이상 없지?”
영준이는 몹시 기뻐하는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은 6학년 아이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상문이 형, 정말 멋져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요!”
아이들의 칭찬에도 6학년 아이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한 태도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입을 벌린 채 그 애를 쳐다보고 있던 태민이가 물었다.
“근데 형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고쳐요? 다음에 또 부탁해도 돼요?”
“아빠가 수리점을 하니까. 거기선 킥보드는 물론이고 자전거나 텔레비전, 컴퓨터 같은 것도 고쳐. 아무거나 망가진 것 있으면 갖고 와.”
“개운교 건너서 골목 옆에 있는 가게 맞죠?”
상문이란 아이는 팔짱을 끼고는 다소 거만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영준이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가 봐야 하니까 수리비나 줘.”
영준이는 당황한 얼굴로 상문이를 바라보았다.
“수리비요?”
“응. 내가 킥보드를 고쳐 줬으니 당연히 줘야지. 안 그래?”
영준이는 약간 붉어진 얼굴을 옆에 서 있는 성호에게 돌렸다.
“야, 장성호! 수리비는 네가 줘. 고장 낸 사람이 주는 게 당연하잖아.”
모여 있던 아이들도 성호를 향해 수리비를 물어내야 한다고 떠들었다. 정황으로 미루어 녀석이 영준이의 킥보드를 빌려 타다가 망가뜨린 모양이었다. 그 이전부터 바퀴를 고정하는 나사가 느슨해졌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성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으로 바닥에 낙서를 했다. 상문이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녀석을 가리키며 한마디씩 하거나 손가락질을 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성재는 상문이에게 걸어갔다. 그 애의 딱 벌어진 어깨와 우락부락해 보이는 얼굴에 주눅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수리비? 얼마면 되는데?”
상문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성재를 쳐다보았다.
“네가 대신 줄 거야? 만 원이면 돼.”
성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상문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웬일인지 상문이는 손바닥을 탁탁 털고 나서 빙긋 웃어 보였다.
“실은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아이들에게 인생이 뭔지 가르쳐 주고 싶었거든. 여긴 수리점이 아니니까 그냥 가지.”
상문이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놀이터를 떠났다. 아이들은 멍하니 그 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한마디씩 했다.
“저 형 정말 멋진데.”
“맞아. 수리비를 달라고 했을 땐 황당했는데 좋은 형 같아.”
거듭되는 아이들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성재는 상문이가 결코 좋은 애는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 애는 수리비를 받으려다 자신이 끼어들자 한 발 물러선 것이리라. 만약 둘이 언쟁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동네 어른들이 몰려올 게 뻔하니까.
성재는 성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녀석이 아이들에게 비굴하게 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잠깐 끌려오던 녀석은 성재의 팔을 홱 뿌리치며 소리쳤다.
“난 집에 안 가! 형이나 가!”
“저녁 안 먹냐?”
“배 안 고프다고!”
“네 맘대로 하겠다는 거야?”
성호는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쳐들었다.
“좀 이따 갈 테니까 형 먼저 가.”
녀석은 미끄럼틀 뒤로 달려가더니 바닥에서 하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성재가 움찔하는 사이 녀석은 쥐똥나무가 무성한 언덕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그것을 본 성재는 더 이상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3학년밖에 안 되지만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리라 여겨졌던 것이다.
성재는 착잡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자신에게 돈이 있다면 성호에게 직접 킥보드를 사주고 싶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성호 대신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마음만 아프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재가 은행나무를 지나 스무 걸음쯤 가다 돌아보니 성호가 언덕 쪽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저녁 해가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날따라 녀석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 보였다.
성재는 모처럼 성호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보통 때는 성호보다 먼저 집을 나섰지만 엄마의 당부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녀석이 더욱 시무룩하게 지내는 것이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학교까지는 대략 15분쯤 걸렸다.
개운교를 건넌 뒤 오른쪽으로 돌아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가면 교문이 나왔다. 그런데 성재의 뒤에서 한참 동안 터덜터덜 걷던 성호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먼저 가라고 했다. 자기는 잠깐 들를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성재는 반쯤 몸을 돌린 채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딜 들른다는 거야? 그러다 또 지각하면 어쩌냐? 얼마 전에도 담임선생님한테 꾸중 들었다며.”
성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도로를 따라 뛰어갔다.
처음에 성재는 녀석이 학교에 가기 싫어 도망치는 줄 알았으나 곧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잠시 도로를 따라 뛰던 녀석은 골목 쪽으로 방향을 돌려 ‘평화수리점’이라는 간판이 걸린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은 바로 상문이 아빠가 운영하는 수리점이었다.
수리점의 커다란 유리문 위에는 공기정화기, 소형 에어컨, 선풍기 등 전기제품은 물론, 자전거, 유모차, 책걸상 따위의 수리가 가능한 물건들이 죽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상문이가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고친다고 한 것은 허풍이었다. 게다가 어디에도 킥보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직 전등이 켜 있지 않아서인지 수리점 안에서도 킥보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호는 유리문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내부를 기웃거렸다.
한참 들여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성재는 녀석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한쪽 벽 앞에 여러 대의 킥보드가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두 색깔과 크기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깔끔했다.
성재는, 부러운 눈길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성호를 지켜보다가 손목을 잡았다.
“그만 가자.”
성호는 성재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형, 조금만.”
녀석은 수리점 내부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멋있다. 그치?”
“멋있으면 뭐 하냐? 네 것도 아닌데.”
성재는 성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아무리 바라봐도 네 것이 되지는 않아.”
그 말에 성호는 성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형은 나빠! 내 것이 아니면 구경도 못해?”
“야, 학교 늦으면 우리 둘 다 망신이야! 너 때문에 나까지 창피 당해야겠어?”
“그럼 형 먼저 가!”
성재는 성호를 향해 주먹을 쳐들었다가 내렸다.
“앞으로는 수리점에 다시 올 생각 마! 그래 봐야 속만 상하니까. 만약 한 번만 더 왔다가는 가만 안 둔다.”
사실 성재는 성호가 수리점에 다시 들르는 것보다 녀석이 엉뚱한 짓을 벌일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운 나머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으니까.
성재는 학교로 이어지는 큰길에 들어서며 재작년에 세상을 떠난 아빠를 생각했다.
평소 아빠는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 없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일 테지만, 이런저런 명목으로 공금을 빼돌리는 동료와 다투다가 5층이나 되는 회사 옥상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분명히 말했다. 다시는 여기에 올 생각 마. 알았어?”
“알았다구!”
성호는 찌푸린 눈으로 성재를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열 발짝도 걷기 전에 수리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본 성재는 녀석의 머리를 앞으로 돌려놓고 힘껏 떠밀었다.
“빨리 안 가고 뭐 해?”
그 말에 화가 난 성호는 한 차례 가방을 추켜올리고 나서 종종걸음으로 앞서 갔다. 마치 1학년 아이처럼 작아 보이는 녀석의 등에서는 커다란 가방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재는 길가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개울을 향해 힘껏 던지고는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웬일인지 성호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정말로 먹지 않은 적은 없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무얼 하는지 8시가 가까워 오도록 오지 않은 것이다.
‘혹시 물고기라도 잡으러 간 걸까?’
성재는 녀석이 개운천에서 물고기를 잡아 어항에 넣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년까지도 가끔 피라미나 송사리 같은 물고기를 잡아온 적이 있었으니까.
‘아냐. 이 시간까지 거기에 있을 리는 없지. 혹시 친구 집에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닐 거야. 엄마 아빠들이 다 계실 시간이니까. 암튼 엄마가 오시기 전에 들어와야 할 텐데.’
성재는 녀석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걱정이었지만 엄마가 알게 될까 봐 그게 더 신경 쓰였다. 피곤한 몸으로 들어온 엄마가 녀석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김치와 두부조림으로 간단히 밥을 먹은 성재는 밖으로 나갔다. 먼저 놀이터에 가 보았으나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동네 할아버지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 큰 은행나무 우듬지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몇 개 걸려 있었다.
성재는 혹시나 싶어 개운천을 향해 뛰어갔다. 개울 어디에도 물고기를 잡는 사람은 없었다. 흐릿한 가로등의 불빛 속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아이들도 보였지만 성호는 아니었다. 성재는 상가로 가서 오락실을 살펴 보았지만 그곳에도 녀석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혹시?’
성재는 성호가 건물 옥상이나 다리 같은 데서 뛰어내린 것은 아닐까 싶어 불안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그런 일을 벌이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킥보드 탈 때를 제외하면 녀석은 아이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으니까. 바로 그때 혹시 평화수리점에서 킥보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다시는 안 간다고 약속했는데.’
곧이어 녀석으로서는 마지못해 한 약속일 거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성재는 재빨리 개운교로 뛰어갔다. 서둘러 다리를 건넌 뒤 골목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로부터 스무 발짝쯤 더 갔을까? 성재는 제화점 입간판 뒤에서 한 아이를 발견했다.
성호로 짐작되는 그 애는 뚫어지게 수리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성재는 먼저 안도감을 느꼈다. 이어서 화가 치밀었다.
‘그깟 킥보드가 뭐라고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오늘은 따끔하게 혼을 내 줘야지.’
성재는 넋을 놓고 수리점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녀석의 뒤통수를 냅다 갈겨 줄 작정이었다. 만약 대들기라도 하면 엉덩이를 힘껏 걷어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제화점 입간판 옆으로 수리점을 바라보니 노란 차양 밑에서 운동모를 쓴 주인아저씨가 킥보드를 수리하고 있었다.
환하게 켜진 전등 아래 킥보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보통 3학년 아이들이 타는 것보다 손잡이가 위로 길쭉하게 올라가 있는 형태였다. 앞뒤바퀴가 각각 하나씩만 있는 데다 전체가 까만색이어서 한눈에도 멋져 보였다.
성재가 성호와 킥보드를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 주인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킥보드를 굽어보더니 허리를 쭉 폈다. 이어서 무엇을 찾으려는지 수리점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성호가 수리점 앞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더니 재빨리 킥보드를 들고 뛰었다.
‘저 자식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깜짝 놀란 성재가 달려가 말리려는 순간, 수리점에서 뛰어나온 아저씨가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 누가 저놈 좀 잡아 줘요!”
이따금 행인들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성호를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작은 체구였지만 녀석의 동작은 어느 누구보다 재빨랐다. 성재도 녀석에게 그런 구석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저씨는 몇 발짝 달리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 성호를 가리키며 잡으라고 계속 소리쳤다. 그때까지 성재는 어두컴컴한 건물 출입문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위층에 음악 학원이 있는지 색소폰과 드럼 등 여러 악기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성재가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성호가 점점 다가왔다.
녀석에겐 킥보드가 제법 무거웠을 텐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5초쯤 지났을까, 출입문 밖으로 뛰어나간 성재는 녀석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순간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이었으나 킥보드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알아?”
“아, 형!”
“그러다가 붙들리면 어쩌려구 그래?”
성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숨만 헐떡거렸다. 그러면서도 누가 쫓아오지 않나 연방 수리점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숨을 가라앉힌 녀석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영재를 쳐다보았다.
“형, 나 좀 놔 줘.”
그때 누군가가 수리점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덩치나 재빠른 동작으로 미루어 상문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애를 본 성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목덜미를 빼내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가만있어!”
순간 성재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무엇보다 먼저, 성호를 끌고 수리점으로 가서 사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록 우발적으로 벌인 짓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엄연히 범죄니까. 게다가 성재는 아빠가 돌아가시게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뒤이어 6학년에다 싸움꾼인 상문이에게 붙들렸다가는 녀석은 뼈도 못 추릴 만큼 얻어맞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뿐 아니라 학교와 동네에서 도둑이라고 소문날 게 틀림없었다.
잠시 갈등하던 성재는 성호를 출입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지하에 내려가 있다가 나중에 나와.”
성재는 성호가 들고 있던 킥보드를 빼앗았다.
이어서 덩치가 작아 보이도록 허리를 굽힌 채 개운교 쪽으로 달려갔다. 가로등의 불빛이 비쳤지만 멀리서 보면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우리라 확신했다.
개운교를 건너는데 뒤에서 상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자식아! 킥보드 안 내놔!”
성재는 그대로 다리를 건너 개운천과 나란히 뻗어 있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그때까지도 상문이는 줄곧 외치며 따라왔다.
“너 잡히기만 하면 완전 죽음이야! 완전 죽음이라구, 인마! 거기 안 서!”
한동안 들려오던 상문이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성재가 뒤돌아보니 그 애는 다리 위에 서서 주먹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성재는 산책로 바닥에 킥보드를 내려놓고 그 위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곧이어 다른 발로 힘껏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산책로를 달려가는 동안, 성재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이라도 수리점으로 성호를 데리고 가서 용서를 구할까? 그게 옳지만 녀석에게 도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게 할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친구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을 테니까. 대신 킥보드 값을 물어줘야지. 둘의 용돈을 모아 아무도 몰래 수리점 안에 놓아두는 거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성재는 가로등의 불빛이 어른대는 개운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재잘거리며 흘러가는 물 위로 힘차게 달려가는 자신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위로 근엄해 보이는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는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 없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것을 본 성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성호를 도와주는 게 급선무니까.
아빠의 얼굴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물 위로 성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킥보드를 탄 녀석은 마치 개운천의 피라미처럼 거침없이 달려갔다. 마을의 놀이터와 운동장, 산책로를 가리지 않았다.
한동안 녀석을 바라보던 성재는 집을 향해 힘차게 발을 굴렀다.